현대 정지이 전무, ‘北風’에 ‘돛’ 달고 순항 중?

현정은 회장, ‘북측서 정 전무에 각별한 대접’ 강조하는 속내는

2008-11-12     권민경 기자

재계 “정 전무에 현대 대북사업 정통성 부여하려는 포석”
현대 “정 전무, 현 회장 수행 차 방북, 그 이상 의미 없어”

[매일일보= 권민경 기자]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장녀 정지이(31) 전무가 그룹 내 보폭을 넓히고 있다. 특히 현 회장의 북한 방문길마다 동행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등 대북사업과 관련해 빠지지 않고 얼굴을 비추고 있다. 정 전무는 지난달 30일 현 회장 및 그룹 임원진들과 평양을 방문했고, 2일에는 현 회장과 함께 김 위원장을 면담한 뒤 김 위원장 옆에 앉아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현 회장은 평양에서 돌아온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 위원장이 정 전무에게 안부를 많이 물어왔다”며 각별한 호감을 갖고 있다는 식의 은근한 발언을 했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현 회장이 주요 대북사업 현장에 정 전무와 동행하고, 그가 김 위원장을 비롯한 북측 인사들에게 특별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정 전무에게 대북사업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현정은 회장은 지난달 30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 등 실무진과 함께 평양을 다녀왔다.방문 기간 중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하고,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백두산 관광은 물론 개성관광에 대한 협의서를 체결했고, 금강산 비로봉 관광도 성사 시키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현 회장은 3일 평양에서 돌아온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방북 성과 등을 발표하며 “김 위원장이 딸(정 전무)을 만난 자리에서 잘 지냈냐고 하고, 이것저것 안부를 많이 물어 보더라”고 말해 김 위원장이 정 전무에게 각별한 호의를 갖고 있음을 내비쳤다. 정 전무 역시 “김 위원장이 내 얼굴을 기억해 주는 듯했다”며 “아버님(고 정몽헌 회장)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고, 안부도 많이 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김 위원장은 이번 현 회장 일행을 만나 환담을 한 뒤 기념촬영을 할 때 정 전무를 자신의 왼쪽에 앉히는 등 특별한(?) 대접을 했다.  정 전무는 앞서 2005년 7월 현대상선 과장으로 재직 시에도 현 회장을 수행해 북한 원산에서 김 위원장을 만난 바 있는데, 당시에도 김 위원장은 정 전무에게 “안경만 쓰면 아버지를 꼭 빼 닮았다. 꼭 아버지를 보는 것 같다” 고 말하며 친근함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무는 또 같은 달 있었던 개성 시범 관광 행사에서도 현 회장과 함께 개성을 방문하는 등 대북 주요 행사마다 현 회장을 수행해 북측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 측, ‘김 위원장 정 전무 환대’ 은연 중 내비쳐

이처럼 정 전무가 유독 현 회장의 방북길마다 동행해 모습을 드러내고, 더욱이 북측에서 환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재계 안팎에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고 있다.재계에서는 “업무상으로만 보자면 정 전무가 대북 사업에 나설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 “이는 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에서 정몽헌 회장, 그리고 정 전무에게로 대북사업의 ‘정통성’을 승계하려는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정 전무의 공식적인 직함은 현대그룹의 시스템 통합업체인 현대U&I 전략 기획 담당 전무. 대북사업을 전담하는 현대아산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므로 엄밀히 따지자면 현 회장의 방북길에 동행해 대북사업에 참여한다거나, 그룹 주요 회의 때마다 현 회장 옆을 지키며 보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사실상 그의 본업(?)은 현 회장 주도의 대북사업에 ‘비서실장’ 격으로 참여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높다. 현대 측에서는 이에 대해 “정 전무의 주요 업무는 현대U&I 관련 일”이라고 강조하며 “정 전무의 동행은 단순히 어머니인 현 회장을 수행한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 회장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많은 의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정 전무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현대 측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베일 감춰져 있던 정 전무, 공식 언론 데뷔도 ‘북’에서

고 정몽헌 회장의 장녀인 정 전무는 현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뒤 일찌감치 현대의 경영권을 이어받을 인물로 점쳐져왔다. 그러나 유난히 언론 노출을 꺼렸던 터라 현대상선에 입사한 후에도 외부 노출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 당연히 언론에서도 정 전무에 대한 보도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그처럼 베일에 감춰져 있던 정 전무가 공식적인 언론데뷔전을 치른 것이 다름 아닌 ‘북’에서였다. 입사 1년6개월 만인 지난 2005년 7월 현 회장이 북한에서 김 위원장을 비롯해 북한 고위 당국자를 만나는 자리에 동행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 전무는 당시 오찬을 겸해 이뤄진 김 위원장과의 접견은 물론, 공식 기념사진에서도 현 회장, 김 위원장과 나란히 자리를 지키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가장 주목받는 현대 측 인사로 떠올랐다. 현 회장은 정 전무와의 동행에 대해 “북측에서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해서 비서 겸으로 갔다”고 짧게 설명한 바 있다. 하지만 정 전무의 동행은 단순히 ‘장녀로서의 수행’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당시는 현 회장이 남편 사후 갑작스럽게 경영권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시숙부인 KCC 정상영 회장 측과의 힘겨운 분쟁을 마무리 짓고 대북사업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던 때였다. 또 그동안 현대의 대북사업을 주도하고 있던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을 퇴진시키며 현 회장 친정체제를 구축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각에서는 ‘정씨의 현대’가 아니라 ‘현씨의 현대’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곱지 못한 시선까지 나오기도 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정씨’ 성을 물려받은 정 전무를 현 회장 방북길마다 동행시켜 북측을 비롯한 재계 안팎에 정 전무의 존재를 각인시킴으로써 현 회장이 맡은 대북사업의 ‘정통성’을 확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자신의 친정체제에 대한 외부의 부정적 시각을 차단하고 대북사업에 힘을 싣는 것은 물론, 정 전무가 대북사업의 ‘적통’임을 알려 승계를 위한 포석까지 마련하려는 뜻으로 재계는 풀이했다. 

정 전무, 대북사업 ‘적통’ 알려 승계 포석 삼나

실제로 이후부터 정 전무는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 두 차례나 참여한 것 외에도 현대의 대북사업과 관련된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북측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지난해 5월 있었던 내금강 남북한 공동답사 때도 현 회장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며 보덕암과 만폭팔담을 꼼꼼히 돌아보는 등 사업구상을 하기도 했다. 한편 현대 측에서는 정 전무가 대북사업 관련 행사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북측에서 환대를 받고 있다는 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정 전무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더욱이 정 전무에 대한 재계 안팎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혹여라도 ‘승계’와 관련된 부정적 말들이 새어 나갈까 입단속을 하는듯한 분위기. 현대그룹은 “일을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배우는 단계”라며 “정 전무의 방북을 비롯한 행보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현대아산 관계자 역시 “대북 관련 행사마다 범 현대가의 가족들과, 현대그룹 전 계열사의 임원들을 초청해왔다”며 “그 가운데 참석 가능한 분들이 오는 것이고, 정 전무 역시 초청장을 받고 스케줄을 고려해 참석하는 것 뿐이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어 “비단 계열사의 임원 자격으로서 뿐 아니라, 북측에는 아버지인 고 정몽헌 회장의 유품과 추모비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장녀로서 함께 가는 것”이라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현대U&I 역시 입장은 마찬가지. 현대U&I 한 관계자는 “최근 정 전무 활동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그룹 차원에서 일체의 대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일축했다.

권민경 기자 <kyoung@sisa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