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막내린 '민주화세력 시대'

2007-12-19     매일일보
【서울=뉴시스】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17대 대통령선거에서 압승을 거둠에 따라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돼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10년에 걸친 ‘민주화세력 집권시대’도 막을 내리게 됐다. 이 후보의 당선으로 향후 국정운영의 주체도 이른바 ‘386 운동권 출신’에서 ‘중도 내지 보수적 전문가(테크노크라트) 그룹’으로 급격히 이동할 전망이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한국 정치무대의 중심에 등장한지 10년 만에 집권에 성공하고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한 ‘민주화 세력’이 퇴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 '민주화 세력'의 퇴진은 무능과 독선,세계화의 큰 흐름속에 '실용과 경쟁’을 추구하는 21세기의 화두를 따라잡지 못하고 낡은 이념의 집착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무능과 오만,독선으로 점철된 10년 이땅에 지난 10년간의 ‘민주화 정부’를 구성한 핵심 세력은 이른바 ‘386세대’.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0대를 지칭하는 말로 10여년 전부터 쓰인 용어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청와대와 국회로 대거 몰려 가면서 386세대는 집권의 중심세력이 됐다. 그러나 국가 운영경험이 전무한 386 세대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명분 아래 집권 기간 내내 낡은 이념 논쟁에만 집착하고 ‘아마추어리즘’으로 일관,국가의 비전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신악이 구악을 뺨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각종 권력형 비리등이 잇따르는 등 과거 집권세력에 비해서도 뚜렷한 도덕적 우월성마저 보여주지 못했다. 민주화세력의 전성기는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반작용으로 국민들이 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 과반수 의석을 밀어 주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에대한 자만 때문인지 ‘집권 민주화세력’은 이후 국회는 물론 각종 정책 입안과정에서 오만과 독선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들과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적으로 몰아 붙이고 사사건건 “수구” “반동” 이라는 용어를 동원했다. 이런 기조위에서 국무총리와 장관직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이 지난 5년간 뱉어 낸 말들로 보수세력 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마음을 다쳤고 “누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집권세력이고 누가 야당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그치지 않았다. 여기에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서해 NLL(북방한계선) 문제,'북한 퍼주기 논란'등으로 국민들을 극도의 이념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석연 변호사는 이번 대선의 결과에 대해 “386에 대한 무능과 실망, 현정권의 부패 무능에 대해 국민들이 외면한 결과다. 국민들은 화려한 수사에 현혹되지 않고 실용적인 판단을 했다”고 진단했다. ◇부자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까지 등 돌리게 한 경제이념-'균형과 분배’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각종 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균형과 분배’이다. 민주화 운동 출신답게 부자보다는 서민,재벌 보다는 중소기업,서울등 수도권 보다는 지방의 발전을 추구했다. 그러나 수도 이전등 핵심 정책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거나 보수층의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대기업에 대한 선입견과 견제,규제정책이 지속됨으로써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실패,젊은층을 ‘이태백’으로 만들고 말았다.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극도로 나빠지고 수출산업과 일부 대기업 위주의 호황만 지속되는 극심한 양극화 속에서 종합부동산세등 부자들을 압박하는 정책을 밀어 붙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따른 부유층의 소비억제는 오히려 서민들만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배상근 박사는 “노무현 정부 5년동안 균형이라는 명분으로 분배에 치우친 경제정책에 치중,국가적인 성장동력을 상실했다”면서 “부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는 애당초의 발상 자체에 큰 문제가 있었다”고 말했다. ◇386마저 등 돌리고 보수화 이같은 국정 실패를 지켜보면서 386세대 마저 등을 돌리고 뚜렷한 보수화 경향을 보였다. 당장 취직을 걱정해야 하는 대학생등 젊은층도 집권세력을 외면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1997년과 2002년 대선때까지만 해도 보수 대 진보·개혁은 절반씩의 지지율을 유지해왔다. 김대중 후보는 57만 표 차로 이회창 후보를 눌렀고 2002년 노무현 후보는 39만표 차로 이회창 후보를 물리쳤을 만큼 1~2% 안팎의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10년 만에 국민들은 진보세력에 싸늘하게 등을 돌리고 보수 쏠림현상을 나타냈다. 국민들의 보수화 경향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대선 레이스 종반까지 지지율 1,2위를 차지할 정도로 뚜렷했다. 386은 물론, 일반 유권자들에게도 더 이상 이념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민주 대 반민주가 구시대적 대립으로 인식될 정도로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국민의 가치관은 실용적으로 변모해온 현실을 집권세력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6월 항쟁을 주도한 ‘민주세력’이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에도 불구, 지지세력의 분노가 표출되면서 여권의 정국운영 시나리오는 휴지조각이 됐고 장밋빛 전망도 빛이 바랬다. 민주 집권세력은 보수세력의 저항 때문에 개혁이 좌절됐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독선과 아집으로 역사의 중층적 의미를 해독해 내지 못한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이헌 변호사는 “386이 민주화의 물꼬를 튼 공로는 인정하지만 그들의 속성은 투쟁에 있었기에 집권 이후 정책 비전을 심어줄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면서 “아군과 적군만 나누며 논쟁하다 국민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만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