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사태 3년의 기록…‘희망버스’가 있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외로운 고공 투쟁, 트위터의 힘 증명

2011-11-10     서정철 기자
[시;사서울=서정철 기자] 수년간 극한대립을 이어오던 한진중공업 노사가 10일 정리해고자 94명을 본합의를 체결한 날로부터 1년 내에 재취업 시키기로 하고, 해고기간 이전의 근속년수에 따른 근로조건을 인정하는 합의안을 최종 타결했다.

전날 갑작스러운 경찰 투입으로 찬반투표가 무산된 바 있는 한진중공업 노조는 이날 총회를 다시 열어 잠정합의안을 무투표로 가결했다.

극한으로 치닫던 진통을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끌어온 한진중공업 노사 문제의 발단은 2009년 회사의 정리해고 방침 발표였다.

그해 12월 사측은 조선업 불황에 따라 희망퇴직 349명이 포함된 400여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정리해고, 설계부문 분사 등을 통해 600여명을 추가로 감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사측은 2010년 2월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계획을 신고했고, 노조는 같은 해 1월5일부터 2월19일까지 부분파업, 2월26일에는 1200여명이 참가한 전면파업에 나섰다.

당시 회사와 노조는 인위적 구조조정 중단·파업철회 등을 골자로 합의를 이뤘지만 이후 계속된 임단협 과정에서 사측의 불성실한 교섭 태도로 인해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노조는 2010년 5월부터 7월까지 진행한 추가교섭에서 진전이 없자 8월12일부터 25일까지, 9월16일 부분파업을 벌였고, 9월28일부터는 부분파업을 계속 이어갔으며, 2010년 12월20일부터는 전면파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올해 1월6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영도조선소 85호 타워크레인에서 농성을 시작했지만 1월12일 사측은 희망퇴직 거부 생산직 290명에 대해 정리해고를 통보했고, 2월14일 다시 희망퇴직 신청자를 제외한 근로자 170명을 정리해고하면서 직장폐쇄에 들어갔다.

이어서 5월9일 사측이 노조원 등에 대해 퇴거 및 출입금지 가처분을 제기하면서 사태는 사측의 일방적인 승리로 이어지는 듯했다.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6월11일 ‘1차 희망버스’의 등장이었다. 트위터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던 김진숙 지도위원의 트위터 친구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1000여명이 영도조선소 앞으로 몰려갔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6월27일 한진중 노사는 ‘총파업 철회 합의문’을 발표했지만 사실상 정리해고를 수용하는 내용에 해고자와 일부 노조원들이 반발을 이어가면서 지방법원에서 퇴거명령이 내려져 강제집행이 시도됐고 사측은 85호 크레인에 대한 단전조치에 들어갔다.

6월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한진중공업 청문회가 열리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7월9일에는 1만 여명이 참가한 ‘2차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몰려갔고, 7월13일부터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 등 노동계와 야권의 단식농성이 시작됐으며, 이어서 7월30일 최대 인원인 1만5천명이 참가한 ‘3차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집결했다.

노사는 8월5일부터 9월7일까지 10차례에 걸쳐 간담회를 개최하고 협의를 이어왔지만 뚜렷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8월10일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고, 8월18일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다.

8월27일에는 ‘4차 희망버스’가 떴다. 4차 희망버스의 목적지는 부산이 아닌 서울 한진중공업 본사였다.

이후 접점을 찾지 못하던 양측의 협상은 국회환경노동위가 10월7일 만장일치로 정리해고자 94명을 1년 내 재고용하고, 이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2000만원 내에서 생계비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권고안을 제안하고, 조남호 회장이 이를 수용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1월9일 노사 잠정합의가 이루어졌고, 10일 노조가 무투표 가결을 선언하면서 최종 타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