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악마는 급여명세서에 숨어있었다

2020-01-02     송병형 기자
[매일일보 송병형 기자]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지난 대선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난무했을 때 필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저’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유일한 판단기준이었던 듯하다. 그저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에서 그나마 저임금 노동자의 사정이 나아지겠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결코 저임금 노동자에 국한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반영된 ‘디테일의 악마’ 그 자체였다.당장 이달 근로자들이 받게 될 새해 첫 급여명세서를 생각해보자. 지난해 국회 입법으로 매월 1회 이상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상여금, 식대, 숙박비, 교통비 중 일정 비율이 새로 최저임금에 포함돼 계산된다. 상여금 등의 비중이 높은 일부 고임금 근로자들까지 최저임금 인상의 혜택을 누리는 걸 막고 사측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취지였지만 노조에서는 ‘올라간 최저임금을 다시 빼앗겼다’고 거세게 반발했다. 그런데 반대로 또 한편에서는 정부가 최저임금법 시행령을 개정해 최저임금 계산에서 주휴시간을 포함해 계산하는 것을 명문화했다. 원래 있던 것을 시행령으로 확인하는 데 불과한 것이지만 사측에서는 임금 부담이 늘어난다고 아우성이다.이렇게 사단이 벌어져서야 필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임금체계가 얼마나 기형적으로 변질돼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우리 임금체계는 그야말로 온갖 논리적 모순이 뒤엉켜 있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주휴수당 문제만 해도 1953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로자를 위해 주휴수당을 법으로 강제했는데, 주5일 근무라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제도는 65년 전 그대로 이어졌다. 그 결과 주휴수당이 토요일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일요일에 해당하는지조차 어림짐작으로 정하고, 법정휴일이니 약정휴일이니 하는 말까지 새로 생겨났다.뿐만 아니다. 사측은 사측대로 연장·야간·휴일 근로수당이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기본급을 최소화 하면서 각종 수당을 덕지덕지 붙였고, 노조는 노조대로 이런 상황을 이용해 최저임금 인상으로 이득을 보려고 애쓰고 있다.가장 실망스러운 곳은 정부다. 월정급여와 수당을 차등과세 하는 세제를 통해 모순을 키우는데 일조해 온 정부는 그동안 최저임금 인상 이후 불거질 사태에 대해 국민들에게 상세히 설명한 적이 없다. 아니 사실상 ‘침묵의 동조’ 행위나 다름없었다고 해도 되겠다. 더 심각한 것은 혼란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무책임한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최저임금을 대폭 올리기에 앞서 임금체계를 미리 정비하는 게 수순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최저임금이 오른 뒤에야 임금체계를 손봐야 한다고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주휴수당 문제도 마찬가지다. 덜컥 시행령을 개정하고 보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먼저 임금체계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시행령을 고쳐 주휴수당을 최저임금 계산에 반영하도록 강제하는 게 맞는 순서다. 일단 고치고 나서 사측에 임금체계를 고치라고 엄포를 놓는 ‘막무가내식’ 행정은 정부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