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한인여류감독영화 美PBS 방영캠페인 눈길

2012-11-23     김창식 기자
[매일일보] 동양인 차별이 노골적으로 심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이름을 떨친 동양의 여배우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애나 메이 왕(黃柳霜, 1905-1961).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계 3세로 태어난 그녀는 동양인역을 서양배우들이 맡던 이 시기 아시안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였지만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동양 여배우로는 선구자적 존재인 애나 왕의 일대기를 재미한인 여류 감독이 무려 8년 간의 제작기간을 들여 다큐영화로 완성한 것이 ‘애나 메이 왕: 그녀 자신의 말(Anna May Wong: In Her Own Words)’이다.

홍윤아 감독의 이 작품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 공개돼 AFP통신이 대서특필해 화제를 모았다. 그녀가 타계한 지 반백년이 지났지만 오늘의 할리우드에서도 동양계 배우들은 보이지 않는 장벽 속에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다. ‘애나 메이 왕’은 동양 여배우의 정체성이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오늘날에 견줘 거의 100년 전의 한 동양 여배우가 어떠한 도전과 성취를 했는지 말해주는 특별한 노작(勞作)으로 평가받고 있다.

홍 감독의 ‘애나 메이 왕’이 중대한 전기를 맞고 있다. ‘글로벌웹진’ 뉴스로(www.newsroh.com)는 최근 이 영화가 내년 5월 미국의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된다고 전했다. 전국 방송인 PBS로 방영되면 애나 메이 왕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아시안 여배우의 위상 강화와 재평가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걸림돌이 있다. TV 방영에 앞서 영화에 활용된 자료들에 대한 저작권을 갖고 있는 여러 도서관과 개인 소장자에게 총 3만 달러의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중 1만 달러는 마련했지만 나머지 2만 달러를 구하기 위해 홍 감독은 11월 한 달 간 인터넷 동영상(//www.kickstarter.com/projects/1107767469/get-anna-may-wong-on-public-tv)을 통해 ‘킥스타터(Kickstarter)’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킥스타터는 정해진 기한 내에 목표 금액에 미달되면 기부자의 약정액이 자동 취소되는 게임 형식의 펀드레이징이다.

이달 30일 마감되는 캠페인에서 지난 18일 현재 모아진 금액은 1만2830달러. 7100여 달러를 더 모으지 못하면 그간의 적립금도 취소된다. 홍 감독은 “애나 왕은 사막같은 할리우드에서 용감하게 싸우면서 자신의 분야를 개척했다. 아시안 여배우로서 선구적 역할을 한 애나 웡의 일대기가 전국 방영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주시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홍윤아 감독은 본래 미술학도였다.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재학 중이던 1984년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보고 감동, 비디오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듬해 미국 유학을 단행, 1987년 NYIT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녀는 1990년 비디오 영화 ‘기억은 메아리처럼’을 제작한다.

1.5세 출신으로 1982년 31살의 나이에 요절한 천재 예술가 고 차학경씨의 유작 ‘딕-티(Di-ctee)’를 소재로 한 것이었다. ‘빌리지 보이스’의 찬사 속에 뉴욕예술재단으로부터 예술지원금을 받은 그녀는 하와이이민 1세대 한국 여성들의 삶을 담은 ‘은하수 여로’로 이탈리아 국제비디오전시회에서 비디오아트부문 1등상을 수상,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녀가 애나 메이 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1년 단편영화 ‘뉴욕에서 여배우 되기’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됐다. 한국계 여배우 3명을 캐스팅, 미국에서 아시안·여배우들이 생존하기 위한 방식을 다루던중 도서관에서 우연히 왕의 10대 사진을 발견했다. 왕은 홍 감독이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 우연히 본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

“상하이 익스프레스라는 영화였어요. 독립적이고 강한 여성을 연기한 왕을 보면서,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여성의 이미지로 강하게 남았지요. 어떻게 이웃집 처녀같이 평범한 모습에서 할리우드의 세련된 여배우가 됐을까. 왕을 통해서 아시안 여배우들의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생각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중국계 3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한 왕은 세탁소 집 딸에서 할리우드 최초의 아시아계 스타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홍 감독이 본 ‘상하이 익스프레스’(1932)에서 왕은 마를레네 디트리히, ‘바그다드의 도적’에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 호흡을 이뤘다.

왕의 무대는 할리우드만이 아니었다. 1920년대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에서 찍은 영화 ‘피카딜리’(1929)에서 댄서역을 맡아 주연 질다 그레이를 능가하는 찬사를 받았다. 런던의 연극무대도 서고 가수로 유럽을 순회하는 등 팔방미인의 재능을 뽐냈다. 그녀의 명성은 러시아와 남미 호주 등지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배너티 페어·보그와 같은 유명 잡지들이 모델로 사진 촬영을 할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홍윤아 감독은 “왕은 서구에서 아시아계 최초 여배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 공리나 루시 루 같은 아시안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도약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왕이 활동했던 시기는 할리우드에서 인종차별이 공공연히 횡행한 시절이었다. 동양인 역할을 백인이 분장을 하고 연기했고 백인 남자배우는 아시아계 여자배우들과 스크린에서 키스하는 것조차 터부시됐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은 펄벅의 원작 ‘대지’를 영화화할 때 일어났다. 왕은 이 영화의 주역 농부의 아내 ‘오란’을 따내기 위해 맹렬히 노력했지만 오란 역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루이즈 레이너에게 돌아갔다. 할리우드는 당시 동양인역을 서양 배우들이 맡으면서 얼굴에 노란칠을 하는 ‘프로덕션 코드’를 충실히 이행했고 농부역도 역시 오스트리아계 폴 무니가 거머쥐었다.

홍 감독은 지난해 AFP와의 인터뷰에서 “애나 웡은 배우 활동을 위해 결혼도 가족도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아시아 여성에게 주역을 맡기는 것을 꺼렸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기를 중단하고 중국구호기금 모금 운동을 하는 등, 중국과 아시아 커뮤니티를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다 1961년 5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애나 왕은 단지 한 명의 아시안 여배우가 아니라 소수계의 ‘유리천정’에 갇혀 있는 미국 속 아시안이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지 시사하는 ‘롤 모델’이 되고 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