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부모님 이혼 후 친할머니 손에 자라…가출·결석을 ‘밥 먹듯이’
한달 새 두 차례 범행…철없는 용의자, 범죄행각에도 죄의식 못 느껴
[매일일보닷컴] 길 가던 행인을 둔기로 내리쳐 금품을 빼앗는 이른바 ‘퍽치기’ 사건이 지난달 6일 ‘벌건 대낮’인 오후 2시경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서 벌어졌다. 주택가의 인적이 드문 시간을 노리고, 도주로까지 확보해 놓는 등 주도면밀했던 범인의 성향을 고려, 경찰은 20~30대 동종 전과자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경찰조사 결과 밝혀진 범인은 놀랍게도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14세 남자 중학생이었다. TV 공개수배 프로그램을 보고 범행수법을 익혔다고 진술한 이 ‘어린’ 범죄자는 경찰에서 “TV에서 본 대로 했더니 어렵지도 않더라”면서 반성의 기미는커녕 초지일관 태연한 모습을 유지해 조사하던 경찰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경찰에 따르면 대담한 ‘대낮 퍽치기’ 사건을 벌인 이모(만 14세·중3)군은 3년전 부모가 금전적인 문제를 이유로 ‘서류상’ 이혼을 한 후 두 살 터울의 동생, 그리고 친할머니와 함께 셋이 살아왔다. 현재 이군의 아버지는 서울 영등포 소재 한 회사에서 숙식을 하며 돈을 벌고 있고, 어머니는 경기도 수원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어, 이들 가족의 만남은 몇 달에 한번 꼴로 이뤄지는 등 이군은 결손가정에서 성장했다. 부모가 이군 등 3명의 생활비를 보내준다고 해도 이혼의 이유가 ‘금전’이었던 만큼 이군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 할리는 만무했다. 경찰에서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용돈이 넉넉지 않았다. 그래서 TV 공개수배 프로그램을 보고 범행수법을 익혀 강도행각을 벌였다”고 진술한 것 역시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 TV라는 ‘선생님’을 통해 범행수법을 배운 이군이 처음 범행을 실행한 것은 지난달 6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장에 나가있어 낮시간대엔 주택가가 더욱 조용하다는 것을 노린 이군은 범행무기로 ‘적별돌’까지 준비해 범행대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이군의 표적은 ‘혼자 걸어가는 부유해 보이는 여성’이었고, 이군이 잠복하고 있던 골목길을 때마침(?) 지나가던 최모(45·여) 여인은 이군의 목표물이 됐다. 최씨는 뒤따라오던 이군에게 의해 ‘마른하늘에 벽돌벼락’ 세례를 맞고,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이군은 최씨가 쓰러져있는 틈을 타 최씨의 핸드백을 들고 줄행랑쳤다. 이군이 경찰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피해자 역시 벽돌로 머리를 가격당한 후 소리 없이 바로 쓰러져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는 것.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이군이 범행을 벌였던 사고지점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으나 고급빌라들이 밀집해 있는 양재동 지역 특성상 각각의 빌라에 개인용 방범 CCTV가 설치돼 있었던 것. 이에 경찰은 범행지역 인근 빌라의 CCTV 테이프를 수거, 범행 시각과 도주거리 등을 고려해 용의자를 특정에 나섰다. 도주로까지 확보, 10대 범행 맞아?
테이프를 수거해 용의자 찾기에 나선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5팀 형사들은 CCTV 탐독결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의자는 바로 피해자 최모씨의 집에서 불과 10여m 떨어져 있는 곳에 살고 있는 ‘중학생’ 이모군이었던 것. CCTV 속 이모군은 검은색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경찰이 이군을 특정 지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단서는 훔친 최씨의 핸드백을 버리려다가 CCTV가 있는 것을 발견한 이군이 카메라를 의식, 버리려던 핸드백을 그대로 들고 사라진 장면에서 이군의 얼굴이 ‘정확히’ 잡힌 것. 이와 관련 한 경찰관계자는 “인적이 드문 시간과 장소를 고르고,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는 대담함, 담을 넘어 도망갈 수 있는 도주로까지 미리 확보하는 등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한 수법이 도저히 14세 중학생의 짓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면서 “피의자 이모군이 작고 마른 체형이라 힘이 없어 피해자가 벽돌로 머리를 맞고도 무사했지만 조금만 더 힘이 셌더라면 피해자는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 경찰조사결과 이모군은 가출횟수가 잦고, 학교 또한 잘 나가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이군의 할머니는 “아이들이 열쇠를 자주 잃어버린다”며 이모군과 동생에게 집 열쇠를 주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때문에 방과후 집에 돌아왔을 때 현관문이 잠겨 있을 경우,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PC방 등을 전전하며 길거리를 배회하기 일쑤였다.이렇게 이군은 자연스레 집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누구하나 세심한 관심을 갖고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14세 어린나이의 이모군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한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혼자 걸어가는 여자 뒤 따라갔다”
경찰에서 모 방송사의 공개수배 프로그램에 나온 범행 수법을 그대로 모방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한 이군은 “혼자 걸어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가 머리를 때리고 돈을 뺏는 수법이 TV에 몇 번 나와 그걸 보고 따라했다”며 “TV에서 본 대로 하니 정말 어렵지 않게 돈을 뺏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군은 현금만 빼낸 후 가방을 버리고,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버리는 등 방송 프로그램에서 본 범행 수법을 그대로 따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이어 “퍽치기 사건을 조사하던 중 같은 달 17일, 같은 지역에서 어린 학생에 의한 강도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동일범의 소행으로 파악하고 수사에 돌입, 이군의 소행임을 밝혀냈다”고 전했다.경찰에 따르면 이군은 17일에도 첫 번째 범행을 저지른 장소 부근에서 혼자 길을 걸어가던 주부 김모씨(39)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이날 이군은 둔기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손과 발을 이용해 김모씨를 마구 때린 후 핸드백을 빼앗아 달아난 것으로 밝혀졌다.이에 대해 경찰관계자는 “이군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는커녕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면서 “재범의 소지가 있어 지난 7일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전과가 없고, 나이가 어린 점을 고려 불구속기소 처분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군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을 수도 있었다’는 범죄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고, ‘이 정도의 범죄로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를 수 있다”면서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적어도 6개월 이상은 경찰에서 이군을 관리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