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 노조 투쟁, 2006년 5월 그 이후…

‘노조활동’ 이유로 해고된 조합원 78명, 지금 그들은 어디서 뭘 하나

2008-04-11     류세나 기자

구미공장 앞 출근투쟁부터 본사 상경투쟁까지…고공농성 전개하며 ‘복직’ 요구
노사간 대화 사실상 단절, 유서까지 쓰며 대화 요구 했건만 사측은 ‘묵묵부답’

[매일일보닷컴]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 언제나 당신보다 나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지난 7일 경기도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는 민중가요 ‘강’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날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 결의대회’의 사회를 맡은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한 관계자는 이 노래를 부른 코오롱 노조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이하 코오롱 노조) 정원철 조합원을 ‘코오롱 노조가 낳은 가수’라고 소개했고, 집회에 참가한 각 사업장의 조합원들은 모두들 그를 안다는 듯한 표정과 환호성으로 정 조합원을 맞았다. 그 말인 즉, 그가 가수만큼 노래를 잘한다는 말이기도 했지만 수없이 많은 집회와 문화제 등에서 노래를 불러 자신을 알려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코오롱 노조의 원직복직 투쟁이 짧지 않았다는 얘기. 이날로 코오롱 노조 투쟁은 꼭 1,141일째 되는 날이었다. 

3년여 넘게 진행되고 있는 코오롱 노조의 원직복직 투쟁의 시발점은 지난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코오롱은 경영상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직원들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려 했다. 이에 노조는 64일 간의 파업으로 맞섰고, 파업을 정리하면서 파업 기간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 임금 동결 등을 받아들이는 대신 사측으로부터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다”는 약속을 받았다.

노조에 따르면 당시 회사는 노조측에 “300여명이 퇴직을 한다면 한숨 돌릴 것 같다”고 말했고, 431명이 희망퇴직했다. 또 노조는 회사측에 임금 15% 삭감과 상여금 200% 반납, 2005년 무교섭 타결을 내주고 ‘구조조정 중단’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300명이면 될 것 같다던 회사측은 2005년 2월 약속을 뒤집었다. 합의에 이른 지 불과 17일 만에 78명을 정리해고 한 것. 그 직후 해고된 78명의 근로자 중 50명은 코오롱 노조 정투위를 구성, 이때부터 이들의 피눈물나는 원직복직 투쟁은 시작됐다.

3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안 해본 투쟁이 없을 정도다. 출근투쟁을 비롯한 각종 집회와 1인 시위는 물론, 본사 로비를 점거하기도 했고, 고압 송전탑과 청와대 앞 타워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며 복직을 요구했다.
또 코오롱 이웅렬 회장의 집에 조합원 10여명이 담을 넘어 들어가 회장과의 면담을 요구했고, 당시 코오롱 노조 최일배 위원장은 동맥을 끊는 위험천만한 결심을 하며 묵묵부답인 사측에 문제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노조측 한 관계자는 “당시 78명의 정리해고는 노조 핵심 전?현직 간부들에 대한 표적 정리해고였다. 그러나 지방?중앙노동위원회, 민사소송, 행정법원 등은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대변하기는커녕 코오롱 자본의 손을 들어줬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조합원만 ‘쏙’ 골라서 정리해고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코오롱 노조 정투위가 회사측으로부터 얻은 것은 하나도 없다. 투쟁으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빚’과 ‘동료애’ 뿐. 또 이들이 깨달은 게 있다면 ‘싸움은 오래될수록 약자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세상의 관심은 줄어들고, ‘해도 안 된다’라는 패배감이 회사보다 더 강력한 자신들의 적이 되고 말았다. 노조측 한 관계자는 “절대적인 힘이 약한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단시간 내에 회사측과 협상을 이뤄 내야한다”면서 “그러나 문제는 이 같은 사실을 강자입장인 사측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노사문제에서 강자의 입장에 위치해 있는 사측은 ‘장기전’을 선택, 투쟁이 시작된 2005년 당시부터 지금까지 ‘무시’전략으로 일관해오고 있다는 게 노조측의 설명이다. 이날 집회에서 만난 최일배 위원장은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동안 솔직히 힘들지 않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나를 지지해주던 가족들도 이제는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말을 하곤 한다. 우리 정투위 조직의 리더인 내가 이정도인데 우리 조합원들의 심경은 어떨지, 가족들 앞에서 어떤 모습일지 안 봐도 훤하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50명에서 시작한 정투위 조합원이 지금은 29명으로 줄은 상태다. 햇수로 4년이 넘은 투쟁을 이어오면서 이정도의 조합원 수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노동계 투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합원의 대부분인 24명은 생계투쟁을 하고 있고, 생업에 뛰어들지 않고 투쟁에만 매달리고 있는 조합원은 위원장을 포함한 5명뿐이다.이와 관련 최 위원장은 “그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함께 투쟁하던 조합원들이 생계에 뛰어든다고 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 없다. 생계투쟁을 하고 있는 조합원들이 매달 20만원의 후원금을 보내주며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응원해주고 있다”면서 “5명, 참 작은 숫자다. ‘5명이서 어떻게 회사를 이겨?’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굴복하면 이 나라의 정의는 없다. 한동안 움츠려 있던 가슴속 분노를 다시 끌어 모아 ‘승리의 불꽃’으로 만들어 보이겠다”며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5명으로도 코오롱과 싸울 수 있다”

이날 집회에는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이상진 위원장도 함께 했다. 대오 맨 앞줄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집회에 참석한 이 이원장은 집회참가자들과 열심히 구호를 외치면서도 발언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면 깊은 한숨과 함께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민주노총에서 일을 시작한 뒤로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많은 집회에 참석했을 그였지만 ‘코오롱’ 결의대회는 그에게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이유는 이 위원장 본인 자신이 지난 2005년 2월 해고된 78명의 코오롱 근로자 중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나도 코오롱 해고자 중 한 사람으로 투쟁일수가 1천일이 넘고, 3년 넘도록 지속되는 이들의 투쟁을 바라볼 때면 이들과 같은, 똑같은 마음고생을 겪었기에 이들의 가슴 고통과 사정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고 말했다.이어 이 위원장은 “집회 현장을 가면 낯익은 얼굴들이 참 많이 있다. 그만큼 장기투쟁사업장(이하 장투사업장)들이 많다는 소리다”면서 “만나면 반갑지만 그들이 힘들고 마음 아픈 사정을 알기에 ‘이제는 그만 봐야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이 같은 생각은 비단 연맹 위원장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사업장에서 투쟁을 하고 있지만 연대투쟁 등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된 이들 노동자들은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기에 이들의 친밀도는 타 조직에 비해 높다.코오롱 노조 이상경(45) 조합원은 “코오롱 노조 투쟁은 2002년 5월 시작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투쟁에 이은 민주노총의 두 번째로 오래된 장투사업장이다. 때문에 기륭전자분회나 한국합섬HK지회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투쟁을 이어오고 있는 사업장의 조합원들과는 매우 친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해가 바뀌어도 늘 만나게 되니까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이제는 집회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이상경 조합원은 생업에 뛰어들지 않고 지금껏 투쟁에만 매달리고 있는 5명의 투쟁팀 중 한명이다. 지난 2005년 이 조합원의 해고통보로 집에서 살림만 하던 전업주부였던 이 조합원의 부인은 남편대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곤 “당신처럼 성실하게 일했던 사람을 어떻게 강제해고 시킬 수 있느냐”면서 남편의 원직복직 투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고통을 함께 해왔다.이 조합원은 “처음 투쟁을 시작할 때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어느 정도 생활을 이어 갔지만 투쟁이 장기화되고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교육비가 많이 들어 지금은 빚더미에 앉아있는 상태”라면서 “최근에 또 빚을 내서 부인이 조그마한 식당을 차렸다. 평소에 주변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돈이 쉽게 융통됐다”는 장난 섞인 말과 함께 들려온 그의 웃음소리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전해졌다.

멈추지 않은 코오롱 구미공장 출근투쟁

현재 남아있는 코오롱 노조 조합원들은 10여년을 하루같이 출근하던 코오롱 구미공장 앞 에 서서 매일 아침 출근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과천 본사 상경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최 위원장은 “시간이 오래지나 조합원들이 모두 지쳐있는 상태다. 사실 처음 투쟁을 시작했을 때와 같은 열정과 의지가 지금까지 남아있지는 않다”면서 “가끔은 리더로서 ‘내가 이렇게 조합원들을 끌고 가야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지금껏 정리해고 요구철회를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회사가 들어줄 수 없는 부당한 요구라면 회사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만나서 들어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실제로 코오롱 노조 정투위와 사측간의 대화는 지난 2006년 5월 이후 끊긴 상태다. 같은 해 4월, 약 한 달간의 교섭이 이뤄졌었으나 이 같은 액션은 ‘보여주기식’ 대응이었다는 게 노조측 주장이다. 형식적인 협상이었을 뿐 사측은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때의 협상도 바로 전달인 3월 27일, 최일배 위원장의 ‘동맥자해’ 사건으로 얻어진 결과물이었다. 사건 당일 코오롱해고자들은 새벽 5시 이웅렬 코오롱 회장 집을 찾아갔다. 경찰은 회장과 이야기 하고 싶다던 해고자들의 연행을 시도했고, 이에 맞서 최일배 위원장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었다. 그는 이미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밖에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유서를 써 둔 상태였다.‘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면서까지 그가 요구했던 것은 단지 ‘회장과의 면담’이었다. 그만큼 사측과 노조와의 협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 후 최 위원장은 감옥에서 꼬박 6개월을 보내야했다. 언론에 공개된 최 위원장이 옥중에서 쓴 편지에 적혀진 그의 원직복직 투쟁이유 소박했다. 그는 “정당한 노동의 댓가로 임금을 받고 일했지만 그가 일해 온 13년간의 세월 덕분에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며 “그런 회사를 퇴사하게 될 때 정년퇴직이든 아니든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하며 가고 싶었다”는 작은 바람을 내보였다.최 위원장은 손목을 자해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조합원들이 고압 송전탑 위에 올라 농성을 벌이고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회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서 “상황을 변화시킬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고, 리더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상황을 마무리 지어야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죽을 각오로 유서까지 썼었다”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이어 “그랬는데도 지금까지 해결은커녕 아무런 대안도 나오지 않고 있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사측 “노조 투쟁은 이미 끝났다”

코오롱 노조 정투위의 ‘애타는’ 마음과 달리 코오롱측은 담담한 모습이다. 이미 법원에서도 이들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계속해서 투쟁을 하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코오롱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이 사태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법적으로도 모든 상황이 종결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이 관계자는 이어 “하도 오래 되서 마지막으로 협상했던 때가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3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사가 대화에 응해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한편 지난 7일 본사 앞에서의 집회를 마친 코오롱 노조 정투위와 연대투쟁 사업장 조합원들은 회사 사옥에 날계란을 던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회사측 한 관계자는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면서 “이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얼만지 아냐”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