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특별지령…열린 우리당 “과반수 사수하라”

2004-11-24     파이낸셜투데이
이해찬‘한나라당 죽이기’총대 멘 사연
올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이 우여곡절 속에 끝남에 따라 이해찬 총리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지금 정국은 여권이 추진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법안과 예산안 처리 등 여야간의 충돌이 예상되는 지뢰밭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다. 한 발만 삐끗하면 재충돌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점에서 이 총리의 행보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이는 17대 국회의 첫 정기국회가 파행을 겪도록 한 원인제공자가 바로 이 총리였기 때문이다.

이 총리는 지난달 28일 대정부 질문 첫날 한나라당 안택수 의원이 대정부 질문을 통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가 퇴보한다”고 한 자신의 베를린 발언에 대해 사과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 총리는 사과 대신 “한나라당은 지하주차장에서 차떼기 하고 고속도로에서 수백억원을 받은 당인데 어떻게 좋은 당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오히려 역공을 취하고 나섰다.
이에 한나라당은 즉각 반발했다. 국회는 파행을 거듭했고, 정국은 급속히 냉각됐다. 민생은 아랑곳하지 않는, 지루한 기싸움이 2주일이나 계속됐다. 예산심의나 법안처리 일정도 무시됐다.

사과 대신 “차떼기 수백억원 받은당” 역공
보궐선거까지 총대 메라…지뢰밭 곳곳 산재 살얼음판

당 지도부가 유감표명을 종용했지만 이 총리는 “차라리 관두겠다”는 말로 이를 거절했다. 결국 김원기 국회의장이 나서고서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묘수가 사과가 아닌 사의(謝意) 표명이었다.이 과정에서 이 총리는 친노 세력으로부터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반면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이들에게서 이 총리가 총대를 메는데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타를 들어야 했다.이 총리의 차떼기 발언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위기탈출을 위한 비상구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수도이전이 위헌 판결을 받아 노 대통령에게 쏟아질 비난을 희석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시 한번 친노 세력의 결집을 이뤄내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따라서 친노 세력이 이 총리에 대해 차기주자라고 애정표현을 한 것은 이들에겐 당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론이다.
그랬기에 가까스로 열린 국회의 4일간 대정부 질문에서 이 총리는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철저히 무시를 당해야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대정부 질문을 하면서도 행정부 수장인 그에게 답변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대기석에 앉혀 놓은 채 일방적으로 비난을 퍼부었다.

급기야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은 이 총리를 해임(?)하기까지 했다. 김 의원은 대정부 질문에 나서면서 “이 총리는 정치적으로 이미 파면됐다”면서 이헌재 부총리를 “총리권한대행”이라고 부른 것이다.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와 관련, “처음에 우리는 술이 취해서 그런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라 권력에 취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국민을 대신해서 훈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떼기 발언이 가져온 여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내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 소장파 의원을 중심으로 속좁은 대응은 피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도 이 총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나왔다. 그러나 대세는 무시하는 기조를 이어가자는 쪽이었다.임태희 대변인은 “의총에서 일부 의원이 이 총리를 상대로 당당하게 질의도 하고 따질 것은 따지자는 의견을 내놨으나 다수의견은 당의 기조를 이어가야 한다는 쪽이었다”고 말했다.

임 대변인은 “국회파행은 이 총리의 한나라당 `폄하발언’에서 비롯됐다”며 “이 총리의 유감표명은 내용이나 형식에서 크게 미흡하다는 판단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 총리를 `총리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당내에선 일부 소장파를 중심으로 대승적인 차원에서 `보다 점잖게’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이성권 의원은 상임운영위에서 “총리를 무시하고 질의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의아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면서 “한나라당이 통 크게 생각해서 국회정상 화에 합의한 것인데 정부의 실정을 지적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보다 (이 총리를) 무시하는 것에 주력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김희정 의원은 네티즌 의견임을 전제하고 “한나라당이 좀 더 품격있게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고 말했다.
앞서 박근혜 대표 자택 만찬에서도 이 얘기가 나왔다. 원희룡 최고위원이 “이 총리 무시는 똑같이 ‘쫀쫀’하게 대응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당내 분위기로 볼 때 한나라당의 총리무시전략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이러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명분이 현재로선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전여옥 대변인은 “총리도 정치인인 만큼 서로가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액션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이러한 한나라당의 전략에 대해 이 총리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외견상 태도는 오히려 담담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모욕에 가까운 비난에도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행동대장’이라는 말에는 빙긋 웃기까지 했다.
본회의장 밖에서도 이 총리는 말문을 닫았다. 대정부 질문이 끝난 뒤에도 기자들에게 소회조차 밝히지 않았다.

이러한 이 총리의 행보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정치권은 전망하고 있다.
지금 노무현 대통령이 남미를 순방중에 있는 것도 이 총리의 행보를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해외에서 외국 정상들과 회담하는데 국내 정국이 소란스러울 경우 그 부담은 총리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가능성이 높다. 5선 국회의원인 이 총리가 이를 모를 리 없다는데 정치권의 인식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휴전상태가 오래 가기에는 돌발변수가 너무 많다. 우선 4대 법안과 예산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첨예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권 핵심부와 한나라당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불신 또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여권 핵심부는 자신이 한나라당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입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드러내고 있다.

이 총리가 한나라당에 대해 “역사를 퇴보시킬 정당”이라고 말한 배경에는 이러한 인식이 깔려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는 한나라당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인식과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시각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을 국정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존재가치가 없는 역사발전의 걸림돌로 생각하는 한 상생의 정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친노 세력의 결집을 위해선 언제든지 한나라당과의 일전불사 카드를 꺼내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이 총리가 또다시 총대를 메고 대(對)한나라당 공략에 나설 가능성은 상존한다는 의미라는 해석을 낳고 있다.

이 총리가 다시 한나라당과의 접전을 벌인다면 그 시기는 노무현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4대 법안과 예산안 처리문제가 계기가 될 것이 유력하며, 이러한 선봉 역할은 내년 4월에 있을 보궐선거 때까지 필요에 따라 계속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정치권은 점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대법원 판결로 과반수 의석이 무너지기 전에는 기싸움이 쉽사리 끝나기가 어렵고, 보궐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라도 당분간 격전과 소강상태가 반복되는 소모전 양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얘기다.
그 한가운데 이해찬 총리가 있을 것이란 예측이 우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