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당하고 한국에 속았네

일본 식민지 피해자 유가족, ‘보상금 사기’ 전모

2009-06-05     류세나 기자

“일제시대 강제 동원 보상금 받아주겠다” 유가족 2천여명 속여
전국 오가며 다단계식 사기 행각…“1명 접수시키면 2만원 줄게”
日에 가짜 사단법인 등록 ‘치밀함’…6개월간 3억2천만원 ‘꿀꺽’

[매일일보닷컴] 1940년대 일본 식민지시대 당시, 전쟁에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을 받아주겠다”며 수억원을 뜯어온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지난 3일 다단계 판매조직을 이용해 전국적으로 2천여명에게 3억2,000여만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송모(남 ∙ 43)씨 등 5명을 불구속 입건하고, 우두머리 격인 고모(남 ∙ 83)씨에 대해 수배조치를 내렸다. 특히 수배중인 고모씨는 황혼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난 2003년, 2005년에도 동일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이다 구속됐던 전력이 있으며, 이들은 완전범죄를 위해 일본 후생노동성에 가짜 사단법인까지 등록해 놓고 피해자들을 속여 온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신림동의 박모 할머니는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일제시대 때 강제징용됐던 사람들이나 그 유가족에 대해 일본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시숙과 시동생 등 여러 명의 가족이 일본군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박 할머니로서는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일본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복잡한 절차를 대행해주는 단체가 요구하는 수수료는 단돈 14만원. 일단 접수만 하면 적게는 2,500만원에서 최대 2억5,000만원까지 보상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박 할머니는 ‘선뜻’ 14만원을 내놓았다. 지난해 10월부터 4월까지 이러한 방법으로 고씨 일당에게 돈을 떼인 사람들의 수는 2천여 명 정도. 경찰에 따르면 이들 일당들은 지난해 11월 ‘사단법인 2차대전 한국인희생자 권익문제 연구소’라는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전국적으로 사기행각을 벌여왔다.

말 빨 좋은 사기꾼에 노인들 깜빡 속아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은 피해자들을 ‘세상 물정을 몰라서 사기당했다’고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고령인 점, 그런 이들에게 ‘어려운’ 법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승소해서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 빨 좋은’ 사기꾼들의 얘기는 신빙성 있게 들릴 법도 하다. 특히 이들 일당의 대표격인 고모씨는 아시아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을 냈던 2001년 무렵, 유족회 부산지부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던 이력까지 있어 소송의 자세한 내용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이러한 지식기반을 바탕으로 이들은 “마이클 최라는 재미교포 국제변호사가 91년부터 13년에 걸친 재판 끝에 승소해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식민시대 당시 일본군에서 강제복무했던 사람이 생존해 있다면 그에게, 사망했다면 남은 유가족들이 보상금을 받게 된다”면서 “일본법원에 보상금 8조7천억원이 공탁돼 있다”고 피해자들을 속여 왔다.하지만 경찰에 따르면 희생자유족회가 일본 법원에 냈던 소송은 1~3심에서 모두 패소해 일본으로부터의 보상금은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또 이들은 피해자들에게 혹시라도 의심을 사게 될까 염려해 지난해 11월 일본 후생노동성에 같은 명칭의 사단법인까지 등록해놓고 “올해 안에 보상급 지급절차가 마무리 된다”고 속여 온 것으로 드러났다.

푼돈 요구하니 주머니 술술 열리네~

고씨 일당의 ‘립서비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강제 징집됐던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 중에 강제동원에 해당하는 나이(만 78세~107세)의 남자만 있으면 생존여부와 관계없이 모두 보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며 보상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들까지 범행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푼돈을 투자해 억대의 돈을 받을 수 있다’는 허위정보를 듣게 된 피해자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사기꾼들의 손에 14만원이라는 돈을 쥐어줬다. 6개월 만에 피해자가 2천여명에 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경찰 관계자는 이와 관련 “‘14만원’은 있으나 없으나 티가 크게 나지 않는 액수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복권’을 사는 심정으로 선뜻 돈을 꺼냈다”면서 “사건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만난 일부 피해자들은 ‘사기’라고 밝혔는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전히 보상금을 기다리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씨 일당은 어떻게 단기간에 2천여 명에 달하는 인원에게 사기를 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들이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사용한 수법은 바로 ‘다단계 모집’ 방식이었다. 고씨는 모 다단계회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서모씨(남 ∙ 62)와 민모씨(여 ∙61) 등 5명을 자신의 ‘사기작전’에 끌어들여 “1명이 접수할 때마다 1인당 2만원의 수당을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고씨의 제안을 받아들인 서씨 등은 지인과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신도 등에게 2억에 달하는 보상금을 받게 해주겠다면서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가족 중에 징집연령의 남성만 있으면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피해자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서울, 대전 등 고씨 일당이 ‘수금’을 위해 이동하는 지역마다 피해보상신청 접수를 하겠다고 몰려드는 인파로 이들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경찰관계자에 따르면 고씨 등은 주민등록등본 사본 ∙인감증명서 ∙사실확인서 등과 함께 현장에서 현금으로 접수를 받기도 했으며, 자신들 명의의 계좌를 사용해 돈을 챙기는 대범함도 보였다. 

역사 피해자 팔아 ‘조상님 뿔났다(?)’

선열들이 분노한 것일까. ‘역사의 희생자를 팔아’ 돈을 챙겨온 온 이들의 사기행각은 6개월여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경찰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피해신고 접수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난립해 있는 유사단체 등에서 피해보상을 빙자, 수수료 명목으로 돈을 받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 수사에 착수했다. 특히 지난 2005년 고씨와 서씨를 같은 혐의로 구속시킨 바 있는 관악경찰서 한기수 지능2팀장은 이 사건이 고씨와 연관돼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 사건을 보다 빠르게 종결시킬 수 있었다.  한편 경찰측은 “정부가 주관하는 피해신고접수는 수수료 등 일체의 청구비용이 없이 이뤄지고 있다”고 강조하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과 관련해 40여개의 유사단체가 난립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돼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