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못 한다” 소견 불구, “강제출국 시키겠다” 으름장
인권단체 반발에 “6개월간 일시 보호해제”…‘눈치보기’도
[매일일보닷컴] 최근 법무부 산하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가 임신 7개월째인 미등록 여성 이주노동자 샤론(필리핀・37)씨를 강제추방하려다 인권단체 등의 비판이 불거진 후, 뒤늦게 일시 보호해제 조치를 내린 사실이 밝혀졌다.
이주공동행동,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등은 지난 7일 오전 양천구 목동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나친 불법 단속이 반인권적인 임신부 단속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회견 전 인권단체들의 일시 보호해제 요청에 “임신 7개월이라도 출국에 문제가 없다”던 출입국측은 기자회견 후 사회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샤론씨에게 일시 보호해제 조치를 내렸다. 현재 항공사들은 ‘32주 이상의 임산부는 의사의 소견 없이 탑승이 불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고, 본지 확인결과 샤론씨는 당시 비행불가 상한선에 가까운 임신 28주째였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이하 외노협) 등에 따르면 필리핀 출신의 미등록 외국인 샤론씨는 지난 3일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자신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집으로 찾아온 출입국관리소 직원에 의해 단속됐다. 당시 샤론씨는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임신 7개월째이니 한번만 봐 달라”며 선처를 요구했지만 결국 출입국관리소 보호실에 구금됐다.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샤론씨는 당시의 충격으로 계속해서 하혈을 해 단속 다음날인 4일, ‘아기는 무사하나 이 상태로는 필리핀으로 갈 수 없다’는 병원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출입국관리소측은 갑작스런 충격으로 인한 ‘임산부의 하혈’에 당황하기는커녕 지난 5일 미등록 외국인이던 샤론씨의 남편까지 단속, 구금시켰다. 한국에 있는 유일한 가족인 남편을 표적단속 함으로써 출산을 목적으로 일시 보호해제를 받지 못하도록 하고, 보호해제를 받더라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점을 노려 빠른 강제출국을 진행시키기 위함이었다.이 같은 일련의 소식을 접한 인권단체들은 기자회견을 갖기 전, 샤론씨의 정신적 안정과 안전한 출산을 위해 이들 부부의 일시 보호해제를 요구하며 출입국관리소측과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임신이 불법체류의 죄를 감싸주지 못한다” “강제출국 번복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는 게 인권단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법무부, 인권보호 마지노선 깼다?
이에 따라 외노협 등 노동시민단체들은 지난 7일 오전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하혈을 계속하고 있는 임산부를 본국으로 추방하기 위해 남편까지 표적단속하는 정부의 악랄함에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며 “정부는 불법적인 가택침입과 임산부 단속에 사죄하고 즉시 임산부와 남편을 보호해제 해야한다”고 주장했다.이날 자리에 참석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국염 소장은 “상식적으로 가장 보호받아야할 임산부가 차가운 쇠창살 안에 갇혀 있다. 이 같은 행태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더 이상 인권국가라 볼 수 없다”며 “국제법에도 보장돼있는 여성의 모성보호권은 불법이든 합법이든 ‘모든 여성’의 권리다. 출입국관리소는 임산부가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여건이 될 때까지 일시보호해제 조치를 취하는 등 인권을 인정하고 관리체계를 개선해야한다”고 말했다.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장서연 변호사 역시 “임산부에 대한 강제단속은 인권의 척도를 가늠하는 마지노선”이라며 “비행이 어렵다는 의사소견에도 불구하고 임산부에 대한 강제출국을 단행한다면 이는 분명한 인권침해이고 반드시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지난 7일 기준 출입국관리소에는 샤론씨 외에도 임신 5개월째인 띠나씨(베트남), 태어난 지 4개월 된 아이를 밖에 둔 마리씨(베트남) 등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거나 ‘엄마’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있는 여성들도 구금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날 자리에는 엄마 친구의 품에 안겨 엄마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시흥시에서 목동 서울출입국관리소까지 온 생후 4개월 된 베트남 아기 클린티도 함께했다.외노협 정영섭 사무차장은 이에 대해 “미등록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강제출국 시키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며 “서울출입국관리소는 간판 상호를 ‘서울출입국 산부인과’로 새로 바꿔야 할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갑작스런 입장 변화 ‘진짜’ 이유는?
여성의 모성권과 인권보호에 대한 뭇 여론의 질타가 두려웠던 것일까. 기자회견을 갖기 전까지 샤론씨와 그의 남편에 대한 구금과 강제출국이 정당하다고 외치던 서울출입국관리소측은 이날 오후 돌연 입장을 바꿔 이들 부부에게 6개월간의 일시보호해제 조치를 취했다. 6개월의 기간 동안 아이를 낳고 안정을 취한 뒤 한국을 떠난다는 조건에서였다.통상적으로 일시보호해제 조치를 취할 경우 보증인을 세우고, 잠적방지를 위해 일정금액의 보증금을 관리소 측에 지불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샤론씨 부부의 경우 보증금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이와 관련 서울출입국관리소측은 애초의 입장과 달리 “임산부가 단속됐을 때 출산하기를 기다려 추방한 사례도 있다”고 애써 변명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이주노동자노조 정영섭 사무총장은 “사건이 크게 이슈화되기 전에 무마하려는 여론의 ‘눈치보기’를 시작한 것 같다”며 “서울출입국관리소 관계자들은 과거 면담에서 ‘출산 10여일을 남겨둔 산모도 여럿 출국 시킨 적 있다’ ‘임신 7개월째인 임산부를 출국시키는 건 아무문제 없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던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6개월간의 일시보호해제 처분을 받은 샤론씨 부부는 현재 남양주시 마석 소재의 자택으로 귀가했으며, 4개월 된 아기를 떨어뜨려 놓은 채 홀로 구금돼 있던 마리씨는 아기 클린티의 여권을 발급받고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속을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리씨의 남편은 이미 4개월 전 강제출국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