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가운’만 입으면 모두 다 의사(?)

<‘의사 대신’ 야간진료 백태> 밤만 되면 ‘풍월’ 읊는 개인병원 원무과장들…의사 퇴근 후 무면허 진료로 ‘환자유치’

2009-08-08     류세나 기자

해당병원 의사, 허위진단서 발급해 보험사로부터 진료비 받아 챙겨
 ‘1人 의사’ 시스템 개인병원, 의사 퇴근하면 “일단 입원시키고 보자”

[매일일보닷컴]지난 4월 5일 밤 9시께, 며칠째 이어지는 야근으로 피곤에 지쳐있던 A씨는 ‘빨리 집에 들어가 쉬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밀려오는 졸음을 애써 참으며 자동차 운전대를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차와 충돌한 A씨는 119 구조대에 의해 인근 개인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서 X레이를 찍은 후 흰 가운을 입은 한 남성에게 ‘부상정도가 심하진 않으나 경과를 지켜봐야하니 입원하라’는 권유를 받은 A씨. A씨는 흰 가운의 남성이 허둥지둥 대는 등 ‘서투른’ 모습을 보여 그가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이왕 다친 김에 병원에 입원해 보험료나 타내자’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입원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의사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흰 가운’을 입고 A씨의 상태를 진단, 입원을 권유한 그 남성은 누구였을까. 의사가 아니라면 과연 누구이기에 그 한밤중까지 병원을 주름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 내막을 <매일일보>이 추적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매일같이 의사를 만나고, 또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의학용어에 익숙해진 병원의 원무과장들. 게다가 이들은 십여 년씩 병원에서 근무를 해온 터라 가벼운 증상에 대한 대처법 정도는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게 있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의사 다됐다”라는 농담 섞인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의술은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일정이상의 교육과정을 거친 전문의가 아닌 이상 함부로 병을 진단내리거나 약을 처방할 수 없다. 때문에 의사란 직업 역시 쉽게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최근 곁눈질로 배운 얕은 지식을 바탕으로 무면허 진료를 한 원무과장과 자신이 진료한 것처럼 허위진단서를 작성한 의사들이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돼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인천남동경찰서는 지난 달 30일 의사가 근무하지 않는 공휴일이나 야간에 병원을 찾은 환자에게 무면허 진료를 한 강모(38∙남)씨 등 개인병원 원무과장 3명을 의료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또 원무과장이 무면허 진료한 환자를 자신이 진료한 것처럼 속여 보험회사로부터 입원비를 받아낸 임모(39∙남) 등 개인병원 원장 10명을 허위진단서 작성 혐의 등으로 불구속 입건했다.경찰 조사결과 강씨 등 개인병원 원무과장 3명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공휴일 등 의사가 상주해 있지 않는 시간대에 교통사고로 경미한 상해를 입고 내원한 환자 35명을 무면허로 진료하고 입원까지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또 임씨 등 개인병원 원장 10명은 원무과장이 진료 후 입원시킨 환자들을 마치 자신이 진료한 것처럼 허위로 진단서를 작성해 보험회사로부터 1천여만 원을 받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환자는 보험금, 병원은 진료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시스템(?)’

이번에 적발된 의사와 원무과장은 모두 개인병원 소속이다. 보통 개인병원은 의사를 따로 두지 않고 원장이 직접 모든 환자를 진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원장이 자리를 비울 경우 해당병원은 환자를 진찰할 수 있는 의료인이 ‘부재’한 상태가 된다.

입원실이 있어 24시간 풀가동이 되는 개인병원이라 하더라도 원장이 퇴근한 이후에는 환자가 내원해도 의료인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진료는 물론 치료 또한 받을 수 없다. 심야시간에 당직을 설 대진의사를 고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하룻밤에 30여만 원의 임금이 추가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은 개인병원으로서는 당직의를 고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와 관련 한 경찰관계자는 “이번에 적발된 병원들은 의료인 부재중에는 환자를 진료, 입원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기 위해 당직을 서는 원무과장이 환자를 일단 입원시킨 뒤 의사가 출근한 다음날 아침에 진료를 받게끔 편법을 써왔다”면서 “병원장들은 지난 밤 원무과장이 작성한 진료차트에 자신이 직접 진찰하고 병명을 확인한 것처럼 서명한 후 이를 근거로 보험사들로부터 진료비 명목의 돈을 받아냈다”고 전했다. 또 야간에 교통사고로 경미한 부상을 입고 찾아온 환자는 보험금을 노리고 있는 경우가 많아 당시 의사가 진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더라도 선뜻 입원을 결정한다. 이는 보험회사에서 지급하는 ‘보험금’과 ‘입원치료비’를 목적에 둔 환자와 병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데서 나타난 병폐라 할 수 있다. 

“등친 건 ‘나이롱 환자’ 뿐”
응급환자는 대형병원 이송

‘의사’란 자고로 생명경외에 대한 소명의식도 갖고 있겠지만 의료행위도 엄연히 기술을 팔아 돈을 버는 일종의 장사고, 사업이다. 대학병원과 같은 대형병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몰려든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것과 대조적으로 동네의 개인병원은 작은 규모만큼 환자 수도 상대적으로 적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놓치지 않으려고 개인병원 원장 등이 이러한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경찰에 입건된 한 병원장은 “개인병원에서는 ‘의료인 부재시 선입원 후치료’는 자연스러운 관행”이라고 진술했다. 또 “경미한 상해를 입은 환자들에 대해서만 ‘관행’을 적용했고, 의사가 없을 때 응급환자가 찾아오면 큰 병원으로 옮겼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자연스러운 관행’이라는 표현대로 실제로 이와 같은 사례는 이번 한번만 적발된 게 아니다. 인천남동경찰서는 지난 5월에도 비용 등을 문제로 대진의사를 고용하지 않은 채 환자들을 원무과장에게 맡겨놓고 해외여행을 떠난 개인병원 원장 15명과 무면허 진료를 한 원무과장 10명을 불구속 입건한 바 있다. 당시 해당 병원들은 이번 사건과 동일한 방법으로 근로복지공단 및 자동차보험사로부터 치료비 명목으로 1억5천여만 원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경찰은 개인병원들의 이러한 위법 행위를 척결키 위해 인천, 서울, 경기 일대 병원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