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양평동 ‘송전탑’ 설치 둘러싼 갈등 [현장취재]
이곳이 강남이라면?!
2013-05-14 이한듬 기자
[매일일보 이한듬 기자] 한국전력공사(사장 김중겸)가 송전탑 설치를 둘러싸고 서울 양평동6가 주민들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 마포당인리발전소에서 목동으로 이어지는 송전로의 중간 길목에 위치한 이 지역의 송전시설을 땅에 파묻는 ‘지중화’ 공사 과정에서 한전과 입주민들이 극명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송전선로가 강을 건너온 지점부터 지중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한전은 예산 부족과 하절기 정상적인 전력수급을 이유로 일부구간만을 먼저 지중화하고 추후에 다른 부분을 지중화 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가운데 양측이 문제해결을 위한 협상을 벌이던 과정에서 한전이 몰래 공사를 강행하려다 주민들의 분노를 부추기고 말았다. 이에 관할청인 영등포구청이 사태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미 한전에 신뢰를 잃은 주민들은 “더 이상 한전을 못 믿겠다”며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끝까지 관철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양평동 6번가 일대 송전로 지중화 작업 두고 한전-주민간 입장차 ‘극과 극’
주민 “지중화 구간 추가해야” vs 한전 “현재 공사부터 하고 나머진 나중에”
서울 양평동6가 한솔아파트 주민들은 요즘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파트단지 바로 옆으로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로가 지나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4월 말 이 아파트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거대한 송전탑이 설치됐다. 이에 주민들은 밤낮으로 공사현장 앞에 모여 한전을 상대로 철탑 철거 및 지중화 작업을 요구하는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과거부터 이어진 갈등
이번 사태가 촉발된 근본적인 배경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강건너 마포당인리발전소에서 목동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전구간의 중간지점인 이 지역은 과거부터 송전탑이 몇 개 설치돼 있었는데, 이중 일부 송전선로가 하필 이 지역 덕양빌라 위를 지나가는 탓에 안전을 우려한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이 일대에 재건축 사업이 추진되고 있던 터라 가공선로(공중으로 케이블이 지나가는 형태의 선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에 덕양빌라 주민들은 2003년 시설 이전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긴 법정공방 끝에 지난 2005년 12월 대법원은 한전에 ‘철탑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한전은 주민들에게 문제가 되는 송전탑의 이전과 송전선로를 땅 속으로 파묻는 ‘지중화’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작업은 한전의 예산부족과 각종 인허가 차질 등의 문제로 올해 3월이 되어서야 겨우 공사가 시작됐다.협상 중 송전탑 설치한 한전
하지만 한전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4-5번 철탑 구간의 지중화를 위해선 23억원 가량의 추가 공사비용이 들어가는데, 수년째 적자 상태인 한전이 추가 비용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주민들이 공사현장에서 시위를 벌이며 항의를 이어가자 관할청인 영등포구청이 중재에 나섰고, 지난 4월16일 첫 협상테이블을 갖게 됐다. 이 자리에서 한전이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4-5번 철탑 구간 추가 지중화 공사가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자 일주일 후 열린 두 번째 협상에서 구청 측은 공사비의 50%를 지원하겠다는 중재안을 내놨다. 그러자 그간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던 한전도 ‘회사차원에서 검토해 보겠다’고 한발 물러난 태도를 취했다.영등포구청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매일일보>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협상 분위기도 긍정적이었고, 한전 관계자가 일단 회사에 구청의 제안을 전달 해 논의한 뒤 4월30일 열릴 3차 협상에서 그들(한전)의 최종 입장을 밝히기로 약속했었다”고 설명했다.하지만 3차 협상 바로 직전 일이 틀어졌다. 어느 정도 의견 조율이 됐다는 안도감에 주민들이 감시를 소홀히 한 틈을 타 한전이 5번 철탑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철탑을 세운 것이다.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들은 5번 철탑 앞에 아예 천막을 치고 앉아 밤낮으로 공사 중단 및 철탑 철거와 지중화를 요구하는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솔아파트 비대위 관계자는 <매일일보>과의 인터뷰에서 “협상에서 대화를 하기로 해놓고 일방적으로 철탑을 설치했다”며 “이젠 더 이상 한전을 믿지 못하겠다”고 분개했다. 영등포구청 관계자 역시 “3차 협상을 앞두고 한전이 돌연 공사를 강행하니 주민들의 분노와 배신감이 컸을 것”이라며 “일단 구청에서 한전에 공사 중단 명령을 지난 5월 초 내린 상황”이라고 말했다.오해가 부른 촌극?
하지만 한전 측은 오해가 있었다는 입장이다. 한전 관계자는 <매일일보>과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입주민들과 협상 중이던 부분은 4-5번 철탑 구간의 추가 지중화에 관한 것이고, 우리가 진행한 공사는 이미 지중화가 약속된 5-6번 철탑 구간의 공사”이라며 “특히 기존 5번 철탑 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철탑은 가공선로를 지중화로 전환해주는 송전탑으로, 주민들이 우려하는 종류의 철탑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또 “주민들이 요구하는 추가 지중화를 위해서는 한강 맞은편에서 건너오는 선로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4번 철탑을 지중화용 송전탑으로 바꿔야 한다”며 “이 작업은 계획수립과 각종 인허가를 거쳐 공사를 하기까지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 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한전 측은 일단 5-6번 철탑구간의 지중화를 먼저 완료하고, 오는 2014년까지 4-5번 구간을 지중화 하는 방안을 구청과 협의 중에 있다. 한전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지만, 현재 구청과 공사비 부담 등에 관한 사안을 논의 중”이라며 “일단은 하절기 정상적인 전력 수급을 위해 5-6번 구간의 공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주민들은 현재 진행되는 공사도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한솔아파트 비대위 관계자는 “협상을 하기로 해놓고 주민들의 뒤통수를 친 한전을 어떻게 믿느냐”며 “주민들의 안전과 생존권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공사를 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이 곳이 강남이었다면 한전이 이런 태도를 보였겠느냐”며 “민의를 저버리고 주민을 무시하는 한전을 상대로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