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저항해도 꿈쩍 않는 이 사회에 우리는 절망한다”
‘지상 위 스튜어디스’, 하늘 위에서 울다...파업농성 911일째, KTX ∙ 새마을 여승무원 등 고공농성 돌입,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단식농성 ∙ 삭발투혼에 이은 최후의 선택…“제발 마지막이길…”
아기엄마 된 여승무원, “아가야, 너는 꼭 정규직이 되거라” 투쟁
그러나 입사 후, 초기에 제시했던 근무조건이 ‘현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 승무원들은 우여곡절 끝에 노동조합을 결성해 원청의 직접고용과 성차별 중단을 요구하며 2006년 3월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같은 해 5월 사측과 도급업체의 계약만료로 380여명의 KTX 여승무원들은 실직자 신세로 전락하게 됐고, 그로부터 3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파업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비정규직의 꽃’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이들 승무원들의 이마에 묶여있는 ‘투쟁’ 머리끈은 영 어색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3년여가 지난 지금은 이들의 ‘팔뚝질’에도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듯하다.
장기간 이어진 파업으로 조합원의 수는 10분의 1로 줄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과거보다 더욱 뜨겁고 진실해졌다. 정당한 파업이기에 끝까지 남아 투쟁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알곡’과도 같은 조합원들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투쟁의 강도도 높아졌다.
지난 27일 KTX ∙새마을호 승무원 등 5명은 서울역 내 지상 40m 조명탑에 올라 철도공사의 적극적인 문제해결 자세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의 첫번째 고공농성이다. 그만큼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얘기다. 그들의 이야기를 <매일일보>이 직접 들어봤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는 말이 있다. 새벽빛이 서울역의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한 지난 27일 새벽 5시, KTX 오미선 지부장, 새마을호 승무원 장희천 대표, 철도노조 황상길 서울지방본부 조직국장 등 5명은 원직복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절대 내려오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갖고 서울역 안 조명철탑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다.고공시위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계획이 무산될까 조합원들에게 고공농성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이른 새벽에 단체숙소에서 나오면 행여나 전경들에게 의심을 받을까봐 전날 미리 짐을 챙겨 숙소로 귀가 하지 않았다. 한걸음씩 철탑을 오르던 순간 승무원들의 머릿속에는 한 걸음에 단식투쟁의 기억, 또 한 걸음에 삭발투쟁, 또 다시 내딛은 걸음에 함께 투쟁하던 조합원이 떠나던 기억 등 3년여 간의 아픈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40m 상공에서 내려다 본 철탑 위 풍경은 이미 날이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에 앞이 가려 뿌연 세상일 뿐이었다고 한다.‘3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조합원 수 줄었지만,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아가씨’에서 ‘아줌마’ 됐지만 투쟁 의지 여전
5명의 고공농성자들이 올라가 있는 철탑 밑 두개의 천막에는 나머지 KTX 여승무원들과 올 1월 1일 계약해지 당한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이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태어난 지 한 달된 갓난아기와 막 걷기 시작한 아기를 데리고 온 여승무원들도 눈에 띄었다. 고속열차 KTX 객실에서 거리로 내몰린 후 계속해서 지속된 900여일이 넘는 투쟁기간이 ‘시간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이와 관련 한 여승무원은 “동료들이 결혼을 해 아기를 낳아 아이와 함께 투쟁현장에 온다는 게 신기하다”며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저 아이들은 커서 비정규직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이들이 처음 KTX 승무원이 됐을 당시 이들은 모두 사회에 첫발을 디딘 20대 초 ∙중반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승무원으로서의 2년보다 더 긴 시간을 파업현장에서 지냈다. 일상이 곧 투쟁이 되어버린 것. 한 승무원은 “솔직히 승무원으로 일했던 시간보다 거리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다. 그런데 아직도 객실 내 곤란해 하는 승객들을 볼 때면 내가 다가가서 도움을 줘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며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지나다니는 승무원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오랜 기간 파업을 했는데도 KTX 열차가 지나가는 걸 보면 아직도 저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같다”고 말했다.파업으로 잃은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었다. 일주일의 5일을 천막에서 지내고, 각 사업장에 연대투쟁을 다니다 보면 하루도 금방 지나간다. 친구들과 통화가 아닌 직접 만나서 수다 떤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이와 관련 KTX 여승무원 박미경(28)씨는 “파업을 시작한 이후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일이 많아져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 거의 없다. 또 친구들을 만나도 내가 원직복직 ∙직접고용 등을 요구하며 3년여 간 투쟁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한 경우가 많다”며 “주위에서 ‘그만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우리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박씨는 이어 “파업을 시작하면서 잃은 게 더 많지만 얻은 게 있다면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해 우리 사회에 개선돼야할 악법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각종 사회적 이슈를 접하기 위해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는 나를 보면 놀랍기도 하다”고 전했다.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
‘우리는 KTX 여승무원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 티셔츠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모습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은 그들은 ‘목표를 두고 싸우는’ 영락없는 투쟁가다. 하지만 한명 한명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듯한 영락없는 20대 아가씨들이었다.박미경 승무원은 “우리도 예쁜 것, 맛있는 것,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20대다. 근데 주위에서 얼굴을 보면 20대인데 대화를 나눠보면 40대 중년 같다고 한다”며 “하루 빨리 평범한 20대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 때 농성현장에 박미경 승무원의 친구가 응원을 왔다. “삐삐~”라고 애칭을 부르며 다가오는 친구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반기는 박씨의 표정은 이미 ‘생각은 40대 투쟁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가 좀 더 편안한 장소에서 친구를 만나 마음껏 수다도 떨고, 그 때의 그 미소가 얼굴에서 가시지 않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