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

파업 1160여일, 해법 못 찾는 기륭전자 사태

2008-10-24     류세나 기자

장기 노숙 ∙ 단식 ∙고공시위 ∙美원정투쟁 불구 노사간 입장차 여전
勞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VS 使 “제3회사 근로성과로 결정”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지난 13일에 이어 15일, 20일, 21일 나흘간 서울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사옥 앞에서는 날카로운 고성이 오가는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기륭전자 비정규직분회 조합원들이 정규직 고용을 요구하며 회사 앞에서 햇수로 4년간 기거해 온 컨테이너 박스를 회사 구사대와 용역들이 강제철거를 시도했고 이를 저지하려던 노조 간에 몸싸움이 빚어진 것.

이런 가운데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과 이상규 민노당 서울시당위원장이 기륭전자 정문 앞 철탑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지만 21일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되면서 기륭전자 노동자의 고공시위는 1박2일 만에 종료됐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22일 정오. 며칠간의 ‘소란함’은 온데간데없이 기륭전자 사옥 앞은 고요했다. 120여명에 육박하던 용역 등 구사대의 인원도 10여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자가 기륭전자를 찾은 그 시각,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날 오후도 여전히 기륭전자 분회의 중식집회는 이어지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강제철거, 폭력사태, 고공농성, 강제연행 등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아직도 얼떨떨해요. 분회장님 등이 철탑에서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을 볼 때 너무 가슴이 아파 저들이 죽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걸 보니 한편으로 고공농성이 어제 끝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흔들리는 철탑에 의지해 추위와 비바람에 맞서야 했을 동지들을 생각을 하면 오히려 잘된 것 같아요. 우리들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기륭전자 조합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대중 앞에 서는 게 긴장됐던 탓일까, 아니면 추운 날씨 탓일까. 이 모두를 부정하는 듯 그녀의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3년 투쟁史, 익숙한 ‘팔뚝질’

이랜드, 코스콤 등과 함께 대표적인 장기투쟁사업장으로 손꼽히고 있는 기륭전자의 파업투쟁은 지난 2005년 7월 5일 시작돼 이날로 1,156일 째를 맞았다.

당시 인력파견업체에서 고용됐던 파견직 노동자 70여명이 노조를 설립하고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점거 농성에 들어갔던 게 이들 투쟁의 시작이었다. 그 해 9월 파견 회사가 농성을 벌이고 있던 조합원 32명에 대해 해고 통보를 하고, 이후 만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들은 원직복직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사측과 수십 차례 협상을 해왔지만 모두 결렬됐다. ‘비정규직 철폐’라는 문구가 새겨진 머리띠를 엉성하게 묶고, 높이 들어 올린 팔이 어색하기만 했던 이들의 ‘팔뚝질’은 이제 ‘제법’이 아니라 ‘완벽’에 가까워졌다.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탓일 터.긴 세월이 말해주듯 그간 노조가 사측을 상대로 지방법원과 대법원에 냈던 7차례의 부당해고 무효소송은 모두 회사측의 승소로 끝이 났다. 하지만 기륭전자 분회의 생존권을 건 투쟁의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벌써 올해 들어서만 3번의 고공농성을 벌였다. 김소연 분회장의 목숨을 내건 94일 단식, 이들과 함께 생계투쟁을 이어오던 故 권명희 조합원의 사망사건 등 최근 잇따라 들려오는 기륭전자 분회에 대한 안타까운 비보는 이들의 투쟁의지를 더욱 다지게 된 계기가 됐다.

최대쟁점은 정규직 전환과 복직인원

1,200여일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기륭전자 사태는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다. 그러나 사측은 지난 12일 교섭을 끝으로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고 선언했다. 최근 기륭전자 지회 일부 조합원과 민주노총 금속노조 관계자들이 기륭전자의 최대 수출사인 미국 전자업체 시리우스 맨해튼 본사 앞에서 피켓시위를 시작하면서 회사측이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그렇다면 3년 넘게 이들의 지리한 싸움이 풀리지 않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인 ‘양측간의 요구조건’은 무엇일까. 문제는 고용형태와 복직인원.노조는 기륭전자가 법적 책임을 지는 자회사에서의 정규직을 요구하고 있는 반면, 사측은 조합원들이 제3의 회사에서 근무, 1~2년 뒤 이들의 근로성과로 정규직 전환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한 조합원은 “기륭자본이 책임도 지지 않는 제3의 회사에서 일을 하라는 건 또 다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고용불안에 떨라는 것”이라며 “회사의 경영실적을 경영진이 아닌 노동자에게 떠넘겨 합법적으로 해고하려는 수작”이라고 비판했다.또 복직 인원의 경우 노조는 2005년 해고통보를 받았던 32명의 조합원 중 복직 희망자 22명의 고용을 요구하고 있는데 반해 사측은 농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생계 투쟁자 10명 외에는 복직이 불가능 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싸움이 타협점을 찾기엔 양측 입장이 극명하게 다르다.

초심으로 돌아가 천막에서 다시 시작

“오는 25일이면 회사사옥이 가산동에서 신대방동으로 이전해요.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투쟁을 시작해야하는 시기죠. 새 사옥이 들어서는 곳은 3년간 생활해 온 컨테이너 박스를 놓을 공간도 없어요. 이제 이건(컨테이너 박스) 다른 동지들에게 물려주고 우리는 천막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려고요. 지켜봐주세요. 꼭 승리하겠습니다.”

지리 했던 3년간의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기륭전자 앞 컨테이너 박스는 이들의 보금자리였다. 잠을 자는 것은 물론이고 이 안에서 끼니도 해결했다. 보금자리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장바구니 속 감자더미에 ‘기륭자본 박살내자’라는 문구가 적힌 작은 나무 조각이 보였다. 감자들도 주인의 염원을 마음속에 함께 품고 있는 것일까. 이들의 농성장에는 이날도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 ‘밟을수록 살아난다 기륭투쟁 승리하자’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류세나 기자<cream53@sisa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