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大豊에도 농촌엔 ‘풍년가’ 대신 ‘곡소리’만
“농사 포기하고 싶어도 할 줄 아는 것 없어” 한숨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 고추 심어라 고추 심고, 배추 심어라 배추 심고, 소를 키워라 키워 봐도 남는 것은 빚더미 뿐 …… FTA가 무슨 소리냐. 우리 농민 다 죽이는 X소리지~ 더 이상은 못 참겠네. 우리 농민 힘을 모아 FTA 박살내세~♪
농민들의 설움을 담고 있는 구성진 노래 가락이 도심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등 30여개 농민단체와 전국각지에서 상경한 농민 2만여명(주최측 추산)은 지난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문화공원에 모여 ‘한미 FTA 반대! 농축수산인 생존권쟁취! 식량주권실현을 위한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자리에 모인 농민들은 한미 FTA 비준 저지를 요구와 함께 생산비 상승 및 농축산물 가격하락, 농가부채 등에 대한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특히 농민들은 정부의 경제위기 대책이 기업과 금융권에만 집중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농자재 가격이 엄청 올라 브렀제. 60%나 올랐으니…. 쌀 생산비도 안 그라요. 15%나 올라 브렀당께. 그런데 쌀 가격은 그대로니 내 속이 안타요. 풍년이 들면 모하요. 우리 농촌은 살기 팍팍해 죽겄는디…. 우리네 사정이 어떤가는 직접 와서 눈으로 보시요. 맴 속으로는 일찌감치 농사짓기 포기했제. 근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벼농사 짓는 거 말곤 없는디 어쩌거쏘. 또 나 같은 시골 촌뜨기를 누가 직원으로 쓰기나 한다요? 어떤 사장이…. 그라요, 안 그라요. 긍게 내가 시방 서울로 이렇게 올라와 븐거 아니요.”
농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새벽밥을 먹고 전남 순천에서 올라왔다는 송완섭씨(52∙남)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농사짓는 즐거움을 잊은 지 이미 오래”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송씨는 “농사꾼은 단순히 ‘농사짓는 사람’이 아닌 온 국민이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생산하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라며 “가격만 저렴할 뿐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외국산 먹거리를 들이려는 한미 FTA는 어떤 성격으로든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大豊에도 빈손, 한숨만 늘어
이날 농민대회에서 만난 농민들에 따르면 올해 농사는 ‘대풍(大豊)’이었다. 그런데 농자재가격 상승, 농수산물 가격 하락으로 1년 내내 농사를 지어온 농부들 손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경상남도는 재배면적이 지난해보다 1.5%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 쌀 생산량을 지난해(42만2,000톤)보다 12.1% 늘어난 47만3,000톤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태풍피해 등이 없었기 때문에 ‘대풍’이 기대된다는 것. 하지만 풍년에도 불구하고 벼 재배 농가들은 풍년가 대신 한숨만 내쉬고 있다. 농자재 가격과 생산비용이 큰 폭으로 오른 반면 쌀값은 소폭 상승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외국 농산물의 수입증가와 경기침체로 인한 수요감소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미국 오바마 정권이 취임하기 전 한미 FTA를 타결하기 위해 가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농민들이 추운 날씨에 차가운 아스팔트 거리로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했다.이와 관련 한국농업경영인 중앙연합회 박의규 회장은 “농민과 국민의 동의 없이 FTA를 체결한다면 과거의 동학농민운동 때와 같은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명박 정부는 죽어가는 기업 살리기에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있으면서도 비료값, 사료값 상승으로 고통 받고 있는 농민들은 외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박 회장은 이어 “1년 12달 허리도 못 피고 일해 수확한 농수산물이 개 사료 가격에도 못 미친다는 현실이 말이 되냐”면서 “고달픈 농촌현실에 종지부를 찍고 농민도 대접받는 세상으로 만들자”고 말했다.지난 10일 목포에서 한미 FTA 반대 국토대장정을 떠났다가 농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왔다는 농민 김지현(전북 고창)씨는 “목포를 시작으로 판문점을 돌아 어제까지 600km를 하루도 쉬지 않고 걸었다”면서 “보름 만에 집에 도착해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FTA가 체결된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며 참가 의의를 밝혔다. 김씨는 또 “농사를 짓고 있어야할 농민이 왜 집이 아닌 여기(여의도 문화광장)에 나와 아스팔트에 앉아 있어야 하냐”며 “진정 정치인들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가장 기본이 되는 농업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가 잡는다고? 농민 잡는다”
전국 농민대회 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비료값(요소비료 20kg 기준)은 20,700원으로 지난해 9,750에 비해 두 배 이상 인상됐다. 또 농축수산물을 수송하는데 들어가는 기름값(경우 1ℓ)도 1,276원(6월 기준)으로 지난해 대비 두 배 가량 올랐다. 사료, 농자재 가격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전국농민회총연맹 송원규 정책부장은 “가격이 오르지 않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유독 농축산물 가격만 제자리걸음하고 잇거나 오히려 폭락하고 있다”며 “전남 나주에서는 생산비조차 건지지 못하는 상황을 비관한 60대 농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지금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를 보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농촌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이와 관련 경남 창원에서 양돈업을 하고 있는 하태식씨는 “정부가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공적자금 중 10조원만 농축산업에 투자한다면 안정적인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기름 값은 내리면서 사료∙비료 값은 왜 자꾸 올리기만 하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경남 양산에서 채소업에 종사하고 있는 윤문희(44∙남)씨는 “‘내년엔 좀 경기가 풀릴까’하는 기대로 한해, 한해를 참고 지낸다”면서 “근로자에게 최저임금이 정해져있듯 우리 농민들도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최저생산비를 정해 놓아야한다”고 주장했다.한편 집회 후 여의도일대 가두행진을 벌이던 농민 중 일부인 1,500여명은 국회진입을 시도하며 약 20여분간 경찰과 대치상황을 빚기도 했으나 큰 충돌 없이 마무리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