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은 임금피크제 희생양?
국민은행 457명 무더기 계약해지 논란
[매일일보=이광용 기자] 국민은행이 비정규직 457명을 순차적으로 계약 해지하는 일이 발생해 논란을 낳고 있다.
국민은행은 이들의 빈 자리를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는 55세 이상 정규직으로 채우기로 해 비정규직에게 고통을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이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일자리 나누기’ 정책에도 반하는 것이어서 노동계에서 비판 여론이 쏟아지고 있다.
계약 해지한 비정규직 자리에 임금피크제 정규직 배치
“후배 아닌 정규직에 자리 내주라는 거냐” 울분 토로
은행측 “KB계열사나 청원경찰 등 재고용하는데 최선”
국민은행은 ‘내부통제 점검자’라는 직책을 받아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457명에 대해 근로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최근 통보했다.
이들 직원은 국민은행 전국 각 지점에서 금융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점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은행 업무 가운데 서류 누락, 자필 사항 미비 등 고객이 기재하지 않은 항목들을 확인하는 것이 주 업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내부통제 점검자들은 외환위기 과정에서 돈을 받고 명예 퇴직한 전 직원들로 구성돼 있는데 한정된 일자리를 나눠야 할 상황이어서 이같이 결정했다”며 “일부 반발이 있긴 하지만 보완작업을 마련해 기존 방침대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은행 측은 임금피크제 시행에 따라 55세 이상 정규직원을 계약직이 수행했던 내부통제 업무를 하도록 교체할 방침이다.
임금피크제는 위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고령인 직원들의 기존 업무를 경비나 서류 확인 등 쉬운 업무로 전환시키고 급여를 삭감하는 제도로 근로자의 정년을 보장하면서 회사의 부담도 줄이는 절충안으로 일자리 나누기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제도다.
이에 따라 그동안 1년 단위로 계약을 자동 갱신하던 비정규직원들은 이번에도 근로를 지속할 것으로 믿고 있었지만 갑작스런 해지 통보에 상실감에 젖어 있다. 정규직을 위해 비정규직을 내쫓는 부당한 구조조정의 사례라고 이들은 비판하고 있다.
2007년 7월부터 시행된 비정규직법에 따라 근무한지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직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했다는 최모씨(56)는 허탈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최씨는 “명예퇴직 이후 국민은행에 다시 돌아와 비정규직으로 있으면서도 평생을 은행원을 천직으로 알고 일했는데 앞길이 막막하다”면서 “후배 직원들이 아닌 똑같이 나이 많은 정규직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것인데, 비정규직이라고 내몰리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라고 하소연했다.
국민은행의 관계자는 “내부통제 점검 업무를 하던 분들은 과거에 명퇴금을 받고 떠났다가 회사가 다시 거둬준 것”이라며 “60세까지 전원 고용을 보장해주면 바람직하겠지만 일자리가 한정돼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따라서 국민은행의 비정규직 문제는 일반적인 사례와는 다르다”면서 “이미 7000여명의 비정규직 가운데 이미 5000여명은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시켰고 이번에 계약을 해지하게 되는 분들도 국민은행이나 계열사에 배치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 측은 해지되는 비정규직원들을 국민은행 청원경찰 업무를 맡기거나 KB신용정보 등 계열사에서 채권추심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재취업의 길을 열어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노동계 일각에서는 은행권 가운데 유일하게 무더기 계약해지 사태가 일어나자 비정규직에게 고통을 떠넘겨서는 안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자리를 나누는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발생해서는 안되며 정규직 노동시간을 비정규직과 나눌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규직 중심으로 조직된 국민은행 노동조합과 금융산업노동조합 등에서는 이번 대량해지 사태에 대해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최근처럼 고용이 불안한 상황에서는 노조가 계약직의 고용 해지까지 문제를 삼아 싸워줄 여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책적으로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통한 고통분담과 일자리 나누기, 기금 운용 등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광용 기자 <skynpine@sisa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