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軍, ‘치마 입은 군인’일 뿐인가…복종만 있을 뿐 인권은 없다
계급 중심∙폐쇄적 분위기에 성폭력 피해 신고 못 해…여군 내부에선 공공연한 비밀
2010-02-22 류세나 기자
군사법원서 군인이 재판관 노릇…계급서 밀리면 가해자로 탈바꿈
제보하려면 군복 벗을 각오해야…피해자 신분 쉽게 드러나기도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女軍이 피해자가 된 군대 내 성폭행, 성추행, 스토킹 등 성범죄 실태에 대한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고 있지 않았지만 이 같은 사건은 언론 등을 통해 심심치 들려온다. 하지만 외부로 알려진 사례는 실제 일어난 사건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 하다는 게 군 관계자와 인권단체 활동가들의 주장이다. 이는 폐쇄적 성격을 가진 ‘군대’의 특성 탓도 있지만 철저한 계급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피해 여군들의 눈물은 상급자의 ‘명령’이라는 미명아래 숨겨져 왔고, 또 지금도 숨겨지고 있다는 게 이들의 의견이다. 특히 직업군인을 희망하고 있던 피해자들은 지속적인 군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피해사실을 숨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의든, 타의든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경우 진급이 어려워지는 것 뿐만 아니라 남은 군 생활마저 견뎌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스토킹 가해자가 헌병대에 고발?
현직 군인 재판관, 신뢰도 점수는…
이 같은 결과의 문제점은 1심인 군사법원에서 법관이 아닌 군인이 심판관으로 재판에 참여한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1심에서는 현직 군인인 심판관이 사실상 재판장 노릇을 하는데 피해자, 피의자가 재판장과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에 인연의 끈이 길고 두터운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1심에서 박 대위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장 김모 대령은 송 소령과 중령 시절부터 함께 근무했던 인연을 갖고 있으며, 진술을 번복해가며 박 대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행정장교는 송 소령과 대대 작전과장-작전장교로 함께 근무한 적 있던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대해 당시 박 대위에게 자문을 줬던 前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이산 활동가는 “이 사건의 1심 재판과정은 사단 재판부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다”며 “재판부는 고발인 송 소령의 스토킹 사실이나 진술번복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고, 항소과정에서 사단 검찰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공판카드에 박 대위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과 박 대위의 지인이 외부단체에 본 사건을 알렸다는 내용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기재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 활동가는 이어 “이는 재판부가 사실관계에 근거하기보다 사건 당사자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군에서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유리한 지를 바탕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초”라며 “이러한 군 사법체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은 계속 미궁으로 빠진 채 피해자만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국성폭력상담소 법정지원팀 이경환 군 법무관은 “최초에 가해자가 헌병대에 고발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 사건의 근원적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군 검찰은 오판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정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며 “법적으로 스토킹 피해를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한정되더라도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면 피해자의 행위는 충분히 다른 각도에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고 지적했다.성폭력을 성폭력이라 말하지 못하고…
이산 활동가가 만난 한 여군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성폭력 사고가 터지면 높은 사람들은 ‘왜 일찍 찾아와서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그런데 막상 헌병대에 신고를 하면 ‘사고 사례’로 처리돼 군생활에 지장을 받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알릴 수 있겠는가. 때문에 피해자들은 신고를 꺼리고, 자연스레 심각한 성범죄도 대부분 은폐된 채 넘어간다. 또 담당 관계자들이 사건을 비밀리에 부치더라도 여군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사건을 제보한 피해자가 누구인지 금방 드러나 2차 피해역시 여군들의 몫이다.”한편 박 대위는 스토킹을 당한 지 22개월, 억울하게 헌병대 수사를 당한 지 14개월, 기소된 지 11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말,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현재 새로운 보직을 받아 A사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