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현충일과 6‧25전쟁일이 있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함이 강조되는 달이다.
어릴 적 나에게 호국보훈의 달(6월)이란 ‘묵념’이었다. 현충일 10시에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묵념을 할 때 ‘왜 묵념의 예를 표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 적이 있었다. 이때 들었던 답변은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답변만으로도 의문이 풀렸다.
그러나 제64회 현충일을 맞이하는 지금, 그 당시의 답변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9주년이 되는 해로, 그 당시 참전유공자분들은 초고령으로,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 점에서 기억의계승은 분명히 중요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기억해야할까? '기억'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수 없다.
단순히 기억하기보다는 무엇을 위하여 기억해야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국가유공자께서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도록 한 ‘신념’이 있고, 그런 점에서 우리의기억은 그 ‘신념’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묵념’은 분명 희생과 헌신에 대한 기억을 계승하기 위한 행위이다. 아니 더 나아가 묵념은‘기억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한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신념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의 공동체’, 더 나아가 ‘신념의 공동체’를 이루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국가유공자분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에 대해 기억하고 선양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분들에 대한 감사, 존경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신념의 공동체를 지향해 나가게 된다.
고귀한 희생에 대한 기억과 선양을 우리는 ‘보훈’이라고 부른다.
물론 엄밀한 의미의 보훈은 개인의 ‘특별한 희생’에 대한 ‘보상’이라는 요소가 덧붙여지고, 보상, 기억, 선양의 주체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일 때이다
.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민간에서 보훈적 성격을 갖는 기억, 선양 활동을 한다면 ‘보훈문화’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을 통해 ‘신념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보훈’과 ‘보훈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훈문화’란 어렵고 자신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개념적으로만 생각하면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보훈문화’란 보훈의 성격을 갖는 일체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희생과 헌신의 기억‧계승과 연관된 일체의 행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부채를 꾸미는 행위와 그결과물도 보훈문화인 것이다.
여기서 ‘일체의 행위’라고 표현하는 것은 보훈문화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희생과 헌신의 기억, 계승 그리고 신념의 공동체를 위한어떠한 방법이든 보훈문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육하원칙의 측면에서 보훈문화를 생각해 본다면, ‘누가’, ‘무엇을’, ‘왜’의 측면에서는 정답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의 측면에서는 정답이 없다. 아니 정답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6월에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보훈문화에 동참해 주시기를 간곡히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