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B급으로 치부할 수 없는 가치의 태동

2019-06-18     오현성 문화기획사 씨즈온 대표
[오현성 문화기획사 씨즈온 대표] 9시 뉴스였었다. 채널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유수의 방송사에서 연일 주요로 소개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다던 소녀의 발언이 그 시작이다. 괴기스런 사건의 전말은 다름 아닌 화제의 상연작에 대한 소개였다. 식인을 연상케 하는 고어스런 타이틀은 청춘 감성을 담은 드라마 장르의 소설이 원작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소개다. 본토인 일본에서는 2016년 서점대상 2위, 연간 베스트셀러 6위 등 인기를 누리며 출간 1년 여 만에 80만부 돌파하며 대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은 그렇다 쳐도 놀라운 현황은 국내 반응이다. 지나가던 뉴스의 한 장면이 뇌리 깊숙이 박힐 정도로 주목하게 된 것은 이질감보다는 흥미로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넘기려던 그저 그런 흥밋거리는 이슈로 구전되며 곧 대 흥행이라는 결과를 불러온다. 개봉 첫날 관람률 3위로 시작해 그해 일본 실사영화 순위 1위를 달성하며 유수의 영화제에도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성공에 원작 소설의 판매증진과 애니메이션 추가 제작까지 그야말로 명작의 성공에 이어지는 수순을 그대로 밟아간다. 필자는 제목 탓에 빌어진 우연에 불과하다 여겼고, 이에 별 다른 이의를 들은 기억은 없다. 관심을 기울인 탓일까?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후 유독 유사 콘텐츠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러던 중 알게 된 것은 이미 이런 부류의 콘텐츠는 한참이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라이트노벨 서가부터 웹 소설 콘텐츠까지 관심이 없었기에 보기를 꺼려했던 소재들에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영화의 흥행은 이런 부류의 콘텐츠가 소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근래 MCN산업의 급속한 발전으로 문화계의 ‘미닝아웃’(meaning out)이 한참인 시대가 도래했다. 자신의 신념을 솔직하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세대들의 행태를 뜻하는 ‘미닝아웃’은 본래 사회운동의 과정 속에서 발생했다. 페미니즘 열풍 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지아 치우리가 2017 S/S컬렉션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오늘날의 여성을 재현하는 패션을 창조하고 싶었다”며 발표한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이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를 발달의 시초로 본다. 이런 슬로건 패션은 인기를 끌며 ‘Futute is Female(여자가 미래다)’, ‘I Am Immigrant(나는 이민자다)’등 개인의 의사를 가감 없이 대중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사회적 흐름 속에서 미디어 환경도 같은 맥락을 잇는다. ‘오타쿠’라 치부되며 음지에서 문화를 향유하던 소수의 공감대가 대중의 기호와 부합하는 앞서의 사건을 계기로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일명 ‘덕질’로 치부되던 그들의 욕구가 이해되는 과정은 앞서 소개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성공 과정과도 유사하다. 독일의 여론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 연구소 설립자인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은 이와 같은 현상을 ‘침묵의 나선형 이론’이라 명명했다. 그녀는 인간은 누구나 고립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주창한다. 대중은 소수의 의견에 속했다고 느낄 때 자신의 의견을 감추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이론의 핵심이다. 즉 본인이 표출하고 싶은 긍·부정적인 다양한 욕구의 발현이 주변의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권력자가 주목받지 못한 화제를 꺼냈을 때 대중은 반대의 의견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일단 해당 견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고, 비판이 나올 경우 이를 잘못된 것이라 평가하게 되며, 소수의 비판자들은 압력을 받아 비판을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이론이다. 근래 눈에 띄는 카피 중에 “부장님 먼저 퇴근하겠습니다”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겠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으로 비추어지는 조직문화에서 반기를 드는 신입사원의 패기에 놀라는 일원의 모습에서 ‘옳음’과 ‘순응’의 이치를 체감하는 심상적인 사례라 생각할 수 있다. ‘B급 문화’라 치부되던 매니아 소재가 크리에이티브 콘텐츠로 격상되는 순간이다. 대중이 권위보다 소통과 공감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비단 국내만의 화두는 아니다. 드라마에서 대통령 역할을 맡았던 정치경험 전무의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우르라이나의 대통령이 됐다.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주지사 당선 이슈는 이제 더 놀라울 것도 없는 기록으로 전락한 해버린 것이다. 하찮게 여겨지던 스트리머들이 만든 ‘먹방’은 이미 전 세계로 확산되어 ‘MUKBANG’으로 불리며 수조원의 경제적 가치를 생산중인 콘텐츠가 됐고, 신동 정도로 여겨지던 어린 기타리스트 정성하는 존 레논의 아내 요코오노에게 극찬을 받으며 글로벌 슈퍼스타로 거듭났다. 중국을 이끄는 콘텐츠 리더 ‘왕홍’의 발생도 국내 블로거 콘텐츠를 차용해 지금의 위상을 이룩할 수 있었단 사실을 돌이켜보면 부족한 콘텐츠 가치인식에 아쉬움이 크다. 국내의 ‘싸이’ 정도의 사례는 그나마 예우를 받은 축에 든다. 근래의 뉴미디어 콘텐츠 시장은 ‘컬쳐-미닝아웃’의 과도기를 넘어 다소 벗어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아직 정책적 인식은 아직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몇 해 전부터 MCN열풍으로 관심이 집중되는가 싶었다가 이내 방관의 수준에 이른다. 물론 자유경제 원칙으로 성장을 거듭하는 과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자칫 콘텐츠 반감 여론을 조성할 수도 있다. 규제와 제한 없는 방임에 대한 가이드가 없다 보니 급급히 대처되는 대안에 불안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여론은 조성됐다. 소재의 다양성도 이제는 대중화의 반열에 올랐다. 사회적인 흐름도 미디어 콘텐츠와 함께 발을 맞춰 걸음을 함께한다. 기성의 미디어가 쌓아올린 권위의 벽을 한순간에 허물어버린 지금 적기의 시기, 조금 더 선진적인 시각으로 콘텐츠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