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버린 필립스...헤매는 경제정책
2019-10-20 박규리 기자
[매일일보 박규리 기자] 한국 경제의 물가와 실업률과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필립스곡선이 완전히 누워버렸다.
20일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8월부터 우리나라 실업 관련 지표는 크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실업자의 경우 1월 122.4만 명, 2월 130.3만 명, 3월 119.7만 명, 4월 124.5만 명, 5월 114.5만 명, 6월 113.7만 명, 7월 109.7만 명 등 올해 들어 100만 명 이상을 지속해 오다가 8월 전년 동월 대비 27.5만 명이나 감소한 85.8만 명을 기록했다. 이어 9월에는 전년 동월 대비 14만 명 감소한 88.4만 명을 기록했다. 실업률 역시 마찬가지다. 1월 4.5%, 2월 4.7%, 3월 4.3%, 4월 4.4%, 5월 4.0%, 6월 4.0% 등 4%대를 유지하던 실업률은 7월 3.9%로 올 들어 처음 3%대를 기록하더니 8월 들어 전년 동월 대비 1%포인트나 줄어든 3.0%를 기록했다. 8월 기준 통계 기준을 개편한 1999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이어 9월에도 전년 동월 대비 0.5%포인트 하락한 3.1%를 기록, 9월 기준 2014년 이후 최저치를 나타냈다.
경제학에서는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 사이에는 반비례관계가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래프 상 실업률이 높으면 물가 상승률이 낮고, 실업률이 낮아지면서 물가 상승률이 높아지는 곡선이 나타난다. 필립스곡선이다. 하지만 한국의 필립스곡선은 완전히 누워버린 형태다. 실업률이 낮아졌는데도 오히려 물가 상승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실업률이 크게 떨어진 8월의 전년 동월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04%, 9월은 -0.4%로 두 달 연속 마이너스였다. 현재 정부는 7개월째 경기부진 판정을 내린 상태다. 한국의 실업률과 경기가 필립스곡선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사실 필립스곡선이 누워버리는 현상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에서는 필립스곡선이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이 같은 현상은 전 세계로 확산하는 중이다. 이에 대해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기술혁신과 세계화 등 새로운 경제여건 변화에 따른 결과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이후 급속히 진행된 세계화로 인해 국제 공급망이 확대되면서 특정 국가의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으며, 여기에 기술혁신의 영향까지 더해져 필립스곡선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 정부가 이미 예견된 사태를 무시한 정책을 펴 왔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최저임금 인상 등 근로자의 소득을 높여 내수 경기를 살리고,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끌겠다는 게 골자다. 이는 필립스곡선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한 정책이지만, 전문가들은 정책 도입 이전부터 우리나라와 같은 경제개방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을 해왔다. 필립스곡선이 작동하지 않으면 임금 인상은 기업의 이윤을 줄여 수요의 큰 축인 기업 투자가 위축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실제 현재 투자 부진은 한국 경기침체의 핵심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정부 내에서는 최근 들어 경제 위기감이 고조되고서야 ‘소비’ 구호가 사라지고 ‘투자’ 구호가 요란해지고 있다.
*필립스곡선이란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 간 역상관 관계를 나타내는 그래프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울번 윌리엄 필립스(A W Phillips)는 1958년 논문에서 고용 증가에 따른 명목임금 상승 현상을 규명했다. 이는 후대에 실업룰과 물가 상승률 간 역상관 관계를 나타내는 필립스곡선으로 발전했다. 명목임금 상승은 기업의 비용 증가와 재화·서비스의 가격 상승을 이끌어 결국 물가를 끌어올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