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인의 백수탈출] 아무리 계산해도 한국에서는 공무원이다
2020-10-31 매일일보
‘관(官)피아’라는 단어가 있다. 관료+마피아를 합성한 말이다. ‘농(農)피아(농식품 공무원+마피아)’도 있었고 세월호 참사 때는 ‘해피아(해양수산부 공무원+마피아)’도 등장 했다. 당시 산하 공공기관 14곳의 기관장 중 해수부 출신이 11명에 달했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카페리 업체 등 민간업체까지도 해피아가 진출한 곳이 적지 않았다. 대형 선박의 안전검사를 담당하는 한국선급이나 출항 전 검사를 담당한 한국해운조합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그 뿐인가. 몇 해 전 보도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의 어떤 퇴직자는 퇴직한 바로 다음 날 좋은 직장, 신의 직장에 재취업하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둔 뒤 하루를 숨 돌리고 나서 출근한 셈이다.
구체적인 예 하나만 들어보자. 2013년 이후 한국은행 2급 이상 임직원 퇴직자에 대한 25건의 재취업·취업승인 심사에서 한 건의 예외도 없이 100% 승인을 내렸다.
한국은행 출신이 재취업한 곳은 △KB생명보험 △현대스위스저축은행 △모간스탠리증권 △하나SK카드 △제주은행 △삼성자산운용 △농협은행 등 금융기관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국화재보험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전국은행연합회, 금융결제원 등 관련 협회·기관의 재취업 사례도 많았으며 일부 퇴직자는 기업으로 들어갔다.
한국은행 2급 임직원은 공무원으로 치면 4급에 해당한다. 2015년 강화된 공직자윤리법(일명 관피아 방지법)에 따라 업무와 관련이 있는 곳에 3년간 취업할 수 없다. 예외적으로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심사를 통해 취업가능·승인결정을 받으면 재취업이 가능하다.
문제는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심사를 통과하는 비율이 너무 높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경우만 봐도 재취업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사례가 한 건도 없었다.
금융감독원의 2급 출신 퇴직자는 퇴직한 지 한 달 만에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재취업 허가를 받고 있었다. 2016년의 ‘4·13 총선’ 때 낙선한 어떤 국회의원은 낙선하고 12일 만에 ‘공기업 사외이사’로 선임되고 있었다.
농식품부, 해양수산부, 공정거래위원회,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등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관료의 퇴직 후 재취업하는 꿈같은 이야기는 이제는 기사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조 전 법무부 장관이 장관직을 사퇴하고 20여 분만에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 복직 신청서를 제출했고, 서울대는 이를 곧바로 수용했다고 했다고 해서 확인 해 본 ‘관료의 재취업의 역사’이다.
조 전 장관은 ‘재취업’이 아니라 ‘복직’이다. 그리고 불법도 아니다.
하여간 대단한 공무원들은 퇴직을 해도 곧바로 새 직장에 출근하고 있다. 구직활동에 걸리는 시간은 누가 누가 빨리하나 부처별 경합을 하는 것 같다.
반면, 비빌 언덕도 없는 서민들은 ‘장기 실업’에 허덕이고 있다. 얼마 전,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아르바이트포털 ‘알바몬’이 취업준비생 927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취업만 된다면 어디든 가겠다”고 밝힌 응답자가 29.1%나 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만둬도 곧 재취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장기 실업 상태의 막막함을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현직에 있는 공무원도 선배 공무원들이 퇴직과 거의 동시에 재취업하는 것을 보면서 퇴직 후의 걱정을 상대적으로 덜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근심 걱정 없는 공무원이 만드는 일자리 정책이 피부에 와 닿기는 어려울 수 있다. 정책이 그래서 그렇까. 일자리 대책이 쏟아지는데도 청년실업, 중년실업은 쌓이고 있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