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직장만 있으면 만고 땡?

고용불안∙노동강도 강화∙값싼 유해물질 사용 등으로 노동자만 ‘골병’

2010-04-30     류세나 기자

업무 중 재해 입어도 찍힐까봐 산재신청도 못 해
“기업, 경제악화시 안전설비 예산 제일 먼저 삭감”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경제위기와 노동자의 건강상태는 어떠한 상관관계를 띠고 있을까. 이 같은 주제를 놓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점은 심리적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악화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요인일 뿐 사회적∙환경적 요인을 놓고 볼 때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또 경기가 악화될수록 노동자의 건강도 더욱 악화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는데 이는 소득이 낮고 고용형태가 불안정한 노동자일수록 그 경향이 뚜렷하다. 게다가 이 같은 영향은 경제위기로 일자리를 뺏긴 노동자는 물론 간신히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드러났다.

#1. 40대 가장 A씨는 최근 회사의 경영악화로 인한 구조조정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바로 옆 책상에서 일하던 김 대리, 미스 한 등이 회사를 떠나가게 됐지만 아쉬움도 잠시,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월급의 일부만 깎였을 뿐 권고사직을 당한 게 자신이 아닌 것이 그저 다행일 따름이다.

이들이 떠나간 후 A씨와 그의 동료들의 회사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퇴사한 직원들이 담당하던 업무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배분돼 잦은 야근을 하게 된 것. 매일같이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도 누구하나 상사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못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불만을 토로했다가는 다음 구조조정 1순위는 자신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서였다.특히 A씨는 최근 업무 중 허리를 삐끗하는 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재신청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특정 사업장에서 산재신청이 잦을 경우 노동부 감사에서 해당 사업장이 ‘문제 있는 회사’로 찍히게 되는데, 결국 그 피해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올 것 같아 사비를 들여 치료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2. 50대 여성 B씨는 모기업의 생산직 종사자다. B씨가 일하는 작업장에도 최근 인력감축 바람이 불었다. 기존에 4곳의 인력업체에서 근로자가 파견돼 각각의 공정을 맡아 일을 해왔는데 지난 1월, 그 중 2개 업체가 계약이 종료되면서 현재 절반의 근로자들만 남아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B씨에 따르면 인력이 지난해 대비 절반으로 줄어든 지금과 지난해 말 생산해내던 물량의 차이는 크지 않다. 그만큼 1인당 담당하는 노동의 강도가 커졌다는 얘기.

또 회사에서는 비용절감을 위해 작업에 사용되던 약품을 값싼 제품으로 교환하고, 작업복 지원도 끊어 B씨와 그의 동료들은 구멍 난 장갑을 끼고 화학약품을 다루고 있다. 게다가 매년 한 차례씩 낙후되거나 위험한 설비를 교체해주던 것마저 내년으로 미뤄져 작업장 내 안전에 대한 철저한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B씨는 “딱 하나 좋아진 게 있다면 잔업∙특근이 줄어들어 퇴근시간이 빨라졌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B씨의 월급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경제위기는 노동자 건강도 위협해”

지난 27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산재사망 대책 마련을 위한 공동 캠페인단,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주최로 ‘경제위기는 어떻게 노동자건강을 잠식하는가’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자리에 참석한 노동건강연대 이상윤 정책국장은 “경제위기는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한다”며 “일자리 유무를 떠나 모든 노동자들은 경제상황에 따라 심리적, 사회적, 개인적 요인에 따라 건강상태가 악화되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국장에 따르면 소득감소, 실업 또는 구조조정 위협 외에도 구조조정을 통한 1인당 노동강도의 강화, 사회안전망의 부재 등도 노동자의 건강을 악화시킨다.또 기업경영이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들이 보다 많은 이익창출을 위해 정부에 다양한 사회규제 완화를 요구하는데 이때 노동자 보호에 꼭 필요한 사회적 규제조차도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사업체 내에서 노동안전보건 활동에 사용되는 비용마저 절감될 가능성이 크다.이날 토론회에 동석했던 민주노총 배광욱 부위원장은 민주노총에 몸담기 전 일했던 곳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배 부위원장은 “10년도 더 된 이야기긴 하지만 민주노총에 들어오기 전 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D사에서 경영혁신팀장을 맡고 있었다”며 “그 회사의 경우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그룹사 사장단을 모아 비상경영체제 돌입을 선언하고 각 단위사업장 별로 예산절감 기획표를 짜도록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배 위원장은 이어 “물가가 상승하고 매출이 감소하는 등 경기가 어려워질 때면 기업들은 예산줄이기에 혈안이 된다”며 “제일 먼저 투자영역인 R&D사업과 설비투자를 줄이고, 안전과 관련된 예산을 무조건 삭감하는데 이렇게 되면 노동자의 산재는 자연스레 증가한다”고 전했다.

총노동시간 감소≠노동강도 약화

하지만 발표된 통계자료 등에 따르면 98년 IMF의 경우, 산재보험 적용률이 경제위기 전후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통계대로라면 사회안전망 약화가 노동자의 산업재해율과 무관하다는 뜻이 된다. 과연 실제로도 그럴까.이와 관련 노동건강연대 이상윤 정책국장은 “일감이 줄어들면서 총 노동시간이 감소해 노동자들의 건강상태가 좋아진 것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업무 중 재해를 입어도 해고 등에 대한 불안으로 산재보험 신청을 기피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그는 이어 “또 산재요양을 하더라도 위기의식 탓에 충분히 치료받거나 재활기간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업무에 복귀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있다”며 “경제위기시 산재보험 통계를 노동자 건강수준을 파악하는 지표로 삼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덧붙였다.사회안전망 등 노동자의 건강결정 요인은 상대적으로 저소득계층에 더욱 부실하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러한 부정적 영향은 저소득 노동자에게 크게 작용될 가능성이 높다.이에 대해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국 조기홍 국장은 “어려울 때일수록 정부가 나서서 사업주와 노동자의 간극을 좁힐 수 있도록 중재해야한다”며 “노동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각종 정책을 수립, 이행해야한다”고 말했다.이상윤 정책국장은 “소득, 실업률, 비정규직 비율, 노동시간 등에 대한 자료를 실시간으로 수집해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저소득 노동자와 이들의 자살예방에 대한 대책 수립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