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19혁명 60주년 맞아 시리즈 영상 제작

사업회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영상 공개 2·28민주운동 및 3·8민주의거, 3·15부정선거와 3·15의거, 4·18고려대시위와 4·19혁명 등 다뤄

2020-04-17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4·19혁명의 역사와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시리즈 영상 콘텐츠가 제작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지선)는 공식 유튜브를 통해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의미를 알리는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그땐 그랬지> 시리즈  3편의 영상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공개된 3편의 영상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2·28민주운동와 3·8민주의거에 대해 다룬 <우리가 등교를 거부한 이유>, △3·15부정선거와 이에 저항해 일어난 3·15의거를 통해 선거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본 <3·15의거 없었으면, 이번 총선 어땠을까?>, △4월 18일, 19일 양일 간의 이야기를 서울 대학가를 중심으로 다룬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 피의 화요일, 4·19혁명>이다.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 그땐 그랬지> 영상 시리즈는 다소 무겁게 느껴졌던 민주화운동을 다양한 시각자료, 효과음, 나레이션 등을 통해 알기 쉽고 유쾌하게 설명한다.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던 민주화운동을 현 시대의 의제와 연결하여 설명함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도모한다. 4·19혁명에 대해 다룬 3편의 영상 외에도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이다.

사업회 지선 이사장은 “사업회가 제작한 영상 시리즈는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제를 통해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기 위한 시도”라며 “올해는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만큼 민주화운동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관심갖고 공감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우리가 등교를 거부한 이유

최근 몇 년간 그레타 툰베리로 대표되는 ‘기후를 위한 등교거부운동’이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일어나고 있다. ‘등교거부’는 학업의 주체인 학생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행하는 집단행동 중 하나다.

등교거부 운동은 1960년대에도 발생했는데,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대구에선 야당인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의 유세 참여를 방해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강제 등교 조치를 내렸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250여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대구의 자발적인 시위 소식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공정한 선거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3월 8일 대전에서도 학교 측에서 학생들의 민주당 선거유세 참여를 막자 이에 항의해 시위가 일어났다.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중요한 사건이지만 오랫동안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2·28민주운동, 3·8민주의거에 대해 알리고, 연대와 협력의 힘에 대해 고민하도록 한다.

3·15의거 없었으면, 이번 총선 어땠을까?

완장을 차고 투표소 앞 지키기, 3명, 5명씩 짝을 지어 공개투표하기, 중간에 투표함 바꿔치기 등은 현재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1960년에는 실제로 발생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부통령 이기붕 후보 당선에 열을 올리던 이승만과 자유당은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선거에 개입하고, 야당 지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심지어는 개헌을 추진하는 등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이 사건이 바로 ‘3·15부정선거’다.

당시 시민들은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강렬하게 저항했고, 특히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3월 15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경찰은 실탄을 장전하여 시민들과 대치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했다. 이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3·15마산시위 이후 실종되었던 17세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면서 전국적인 분노가 폭발했고,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3·15부정선거와 이에 대항한 마산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공정한 선거의 중요성과 잘못된 권력은 시민들의 힘으로 저지할 수 있다는 민주시민 의식을 함양할 수 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 피의 화요일, 4·19혁명

1960년 4월 서울 대학가에선 지역에서도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여러차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 대학생들이 침묵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3월부터 시위를 준비하던 고려대 학생들은 4월 18일 학내에서 모여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을 향해 행진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가 연행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학생 전원 석방을 요구했다.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이 결정되고 학생들이 자진 해산해 학교로 돌아가던 중 정치깡패들에 의해 무차별 폭력을 입게 된다.

4월 18일 고려대 시위와 정치깡패들의 시위대 습격 소식은 4월 19일 연이어 보도되었고, 국민들의 큰 분노를 자아냈다. 10만 명이 훌쩍 넘는 시위대는 경무대(현 청와대) 앞에서 경찰들과 대치했고, 경찰들의 무차별 구타와 총격에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시국선언을 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마침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민주주의의 현실을 돌아보고 앞으로 일상에서 만들어야 할 민주주의는 무엇인지 고민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