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딜펀드 돈 내라" "대출만기 미뤄라" 팔 비틀린 금융권
청와대 불려간 금융회장단, 정부發 잇단 청구서에 곤혹
사모펀드 책임 고스란히 안고 관치펀드는 '총대' 볼멘소리
2020-09-03 이광표 기자
[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문재인 정부가 170조원 규모의 한국판 뉴딜금융 구상안을 3일 발표했다. 하지만 앞서 65조원에 달하는 뉴딜사업 투자 방안을 잇달아 내놓은 금융권에 뉴딜펀드 추가 조성은 만만치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관련 금융지원의 만기가 연장되면서 금융사의 부담이 가중될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한국판뉴딜전략회의'에서 "한국판 뉴딜의 성공을 위해서는 금융의 적극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며 금융권의 협조를 당부했다.
이날 회의에는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 윤종규 KB금융 회장,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 김광수 NH농협금융 회장,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 김지완 BNK금융 회장, 유상호 한국투자금융 부회장, 김태오 DGB금융 회장, 조정호 메리츠금융 회장, 김기홍 JB금융 회장 등이 참석했다.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비대면으로 참석했다.
이날 발표된 뉴딜펀드 조성방안 가운데 정부와 정책 금융기관이 참여해 투자 위험을 줄여주는 '정책형 뉴딜펀드'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향후 5년간 정부가 3조원, 정책금융기관이 4조원씩 출자해 7조원의 모(母)펀드를 꾸리고, 여기에 자(子)펀드를 통해 민간자금 13조원을 매칭한다. 모펀드가 후순위 출자를 맡아 투자위험을 우선 부담해 자펀드의 손실을 방지하겠다는 방침이다.
앞서 국내 주요 금융지주들은 정부의 뉴딜정책에 맞춰 수십조원에 달하는 지원 계획을 쏟아냈다.
신한금융은 '신한 네오(N.E.O.)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직·간접 투자와 대출 등의 방식으로 28조5000억원을 지원한다. 하나·우리금융은 각각 '한국판 뉴딜 금융 프로젝트'와 '뉴딜 금융지원 위원회'를 신설해 10조원씩 지원하고, KB금융은 'KB뉴딜‧혁신금융협의회'를 통해 9조원, 농협금융은 '녹색금융사업단'을 통해 8조원을 공급하기로 했다. 총 65조5000억원에 달하는 투자 규모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을 거란 게 금융권의 걱정거리다. 일각에선 이번 논의를 기점으로 관련 사업의 방향이 구체화할 경우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한국판 뉴딜정책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진행하는 사업인 만큼 금융회사들에게 신성장 기회가 될 수 있다"면서도 "다만 정부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금융권에 과도한 역할이 요구되고 있어 갈수록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 금융권은 뉴딜정책으로 비이자이익 영역을 확대하고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을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을 느끼고 있다.
최근 코로나19 관련 대출 만기연장과 이자 상환유예 등 금융지원 시한이 연장되면서 금융권의 어깨가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4일 기준 전체 금융권에서 이뤄진 대출 만기연장은 약 75조8000억원(약 24만6000건), 이자상환 유예는 1075억원(9382건)에 달한다.
한 시중은행 CFO(최고재무책임자)는 “대출 만기 연장은 해줄 수 있다고 해도 이자 납부를 유예하는 것에 대해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며 “이자도 내지 못할 정도면 6개월 뒤 금융사나 채무자 서로 상황만 악화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코로나 사태로 경기가 나빠지자 문재인 정부는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면서 재원 마련을 위해 금융권에 손을 벌렸다. 지난 4월 민간 금융사들은 10조원 규모 채권시장안정펀드에 8조원을 출자하기로 했다. 이어 증권시장안정펀드, 스마트대한민국펀드 등 각종 정책 펀드에도 금융권이 동원됐다.
작년부터 잇따라 터지고 있는 사모펀드 사고에 대한 책임도 판매사인 은행들에 모두 떠넘기고 있다. 최근 금감원은 판매사들에 라임펀드 투자금 전액을 배상할 것을 권고했다. 배임 문제 등을 감안해 금융사들은 결정을 미루다 결국 권고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국내 금융업이 정치에 휘둘리면서 한국 금융 산업 경쟁력은 후진국 수준을 맴돌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 따르면, 올해 한국 금융경쟁력 순위는 63국 중 34위를 기록했다. 최근 6년간 30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은 물론 중국, 태국보다도 낮은 순위다.
무엇보다 금융권에는 정부에서 보내는 청구서가 가장 큰 골칫거리다. 정부가 각종 위기극복 정책 발표에 앞서 금융권을 향한 이른바 ‘청구서’를 기정사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한국판 뉴딜 등 정부정책 보조를 위해 금융권이 매번 자진 납세하는 분위기"라며 "관치주의에 입각한 '동원령' 형식으로 뉴딜 추진 과정이 변질될 가능성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