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1994년 6월의 데자뷔
2021-09-15 송병형 기자
김영삼 정부 5년은 여러모로 격동기였다. 정권 말기에는 초유의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초기에는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단행이 전격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87년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부로 인해 유예됐던 민주화 작업에 따른 격변과,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쌓이고 쌓인 적폐에 대한 미숙한 청산 작업이 가져온 혼란이 한데 섞인 시기였다. 외교안보 분야라고 다르지 않았다. 먼 나라 이야기 같던 공산권 붕괴의 후폭풍이 한반도를 덮친 것도 이때였다. 뒷배가 사라진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매달렸고, 한반도는 전쟁 일보 직전 상황까지 갔다.
1994년 5~6월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는 비밀리에 영변 폭격을 논의했다. 재처리 시설만 한정해 폭격, 재처리 시설과 원자로까지 폭격, 모든 핵시설과 주요 군사시설 폭격 등 세 가지 옵션까지 다룬 구체적인 논의였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김영삼 정부는 같은 해 6월 주한 미 대사가 한국 내 미국인 철수 의사를 밝힌 뒤에야 미국의 전쟁 의사를 알아챌 수 있었다. 당시 미 국무부 한반도 데스크였던 케네스 퀴노네스는 2000년 펴낸 회고록에서 “뉴욕 42번가 2평 빵집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됐다”고 했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단 한명의 한국군도 동원 불가라며 제동을 걸었고,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노력으로 북미 협상 가능성이 열리며 위기는 빗겨갔다. 다행히 위기는 넘겼지만 한반도의 운명이 워싱턴의 밀실에서 결정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가져온 충격은 우리에게 일종의 PTSD로 남았다.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앞세워 남북 대화에 매달린 것도, 노무현 정부가 자주 노선을 외치며 동북아 중재자를 자처한 것도,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며 김정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1994년의 충격에 원인을 두고 있다.
첫 북폭 위기 이후 4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 3명의 남녘 지도자가 평양을 찾았고, 미국의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북녘 땅을 밟기도 했다. 전작권 반환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1994년 우리가 마주했던 위기의 본질은 그다지 변한 것 같지 않다.
워싱턴포스트의 부편집인 밥 우드워드는 신간 ‘격노’에서 2017년 7~8월 또 다시 북폭 논의가 있었다며 “이것은 진짜 위기였다”고 했다. 우드워드의 책에는 미 국방장관이 북폭을 고민하다 전면전을 우려해 중단했다는 둥 작계 5027의 업데이트가 있었다는 둥 김정은 역시 전쟁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는 둥 1994년을 연상시키는 섬뜩한 이야기가 줄을 잇는다. ‘핵무기 80개’ 언급을 두고 오역 논란이 있지만 본질을 벗어난 이야기다. 23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 없는 현실이 본질이다. 심지어 한국 정부의 대응도 1994년의 데자뷔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반도내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이 결정할 수 있고,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하지 못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