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이상’ 없나

기로에 선 남북관계, 제대로 가동될까

2014-05-22     김영욱 기자

[매일일보]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 주체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가동에 대한 ‘이상’ 유무의 우려가 나오고 있다.일각에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제대로 가동해보지도 못한 채 기로에 서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박 대통령 취임 전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로 촉발된 한반도의 위기는 취임 후인 북한의 3차 핵실험과 유엔 차원의 대북제재, 그리고 3월 내내 이어진 북한과 미국 사이 ‘군사력 시위’를 거치며 장기화하고 있다.일련의 과정에서 직접적인 유탄을 맞은 것은 바로 남북관계의 ‘마중물’이라 불리는 개성공단이다. 지난 3일 우리 인원의 전원 철수 후 현재까지 개성공단은 잠정폐쇄 상태다.‘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신뢰’와 ‘균형’을 키워드로 하는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 브랜드로 내외의 기대를 받았다.‘신뢰’는 ‘벽돌을 하나하나 쌓듯’ 작은 변화를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남북 관계를 정상화, 진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남북 간 불신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금강산관광 문제나 5.24조치 등 이명박 정부가 남긴 유산을 해결하는 것이 그 출발이 될 것으로 보였다.또 하나의 키워드인 ‘균형’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정책 모두에서 장점을 취하겠다는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이전 정부에서 이뤄진 남북 간 합의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보인 만큼, 6.15-10.4선언 존중을 전제로 남북 간 대화가 재개될 것이라는 전망도 유력했다.그러나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세 달이 되도록 남북 사이에는 대화는커녕,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유지되던 개성공단이 잠정폐쇄되는 등 남북관계의 해빙 움직임은 전혀 없는 상태다.‘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첫 발도 떼기 전에 좌초하는 게 아니냐는 진단이 나오는 대목이다.물론 현재의 한반도 위기는 ‘핵보유국의 길’을 천명하고 미국에 정전체제 종식을 요구하고 있는 북한과 기존의 ‘북한 무시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 사이의 대립에 기인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그렇다고 해도 정부가 개성공단 사태를 두고 북한과 ‘책임공방’을 벌이는 사이 아직 각론을 갖추지 못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애초의 철학에서 다른 길로 벗어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북·미 간 대립이 치열한 가운데 우리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좁은 것은 사실이나, 그럴수록 ‘신뢰 프로세스’에 기초한 일관된 메시지를 북에 전달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역할이 아쉽다는 것이다.실제 개성공단 사태는 북측이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고 남북 간 군통신선을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북은 ‘달러박스’, ‘인질 위험’ 등 남측 언론의 보도 등을 문제 삼아 통행제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북측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키 리졸브’ 훈련 등 북·미 간 군사적 대결이 직접 원인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군사적 긴장이 낮아지면 자연스럽게 정상화될 가능성이 높았다.그러나 이후 김관진 국방장관의 ‘인질구출’ 발언이 나오자 북측은 김양건 비서가 직접 북측 근로자 전원 철수 결정을 발표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남측 정치권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김 장관의 발언은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부가 개성공단이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절제된 상황관리를 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에는 남북 당국이 ‘성명전’을 통해 책임공방과 진실게임을 벌이고 있다. 북측이 지난 3일 우리 측 인원 철수 당시 입주기업들의 원.부자재 및 완제품 반출 문제를 협의할 용의를 표명한 것을 두고 북은 남측에 ‘개성공단 정상화에 대한 의지가 있느냐’고 따지고, 우리 측은 ‘남남갈등을 조장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반박하고 있다.

21일에도 입주기업들이 추진 중인 방북과 관련해 북측이 중국에 있는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을 통해 우회적으로 방북 명단 제출 등 절차를 밟으면 협력하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통일부가 이를 거부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문제는 이 같은 공방이 거듭될수록 개성공단 사태의 돌파구는 더욱 요원해진다는 점이다. 이대로 개성공단이 폐쇄될 경우,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남북관계는 아예 동결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경우 금강산 관광 금지가 5년 내내 남북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은 바 있다.이와 관련, 박 대통령은 21일 재와공관장과의 첫 간담회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에 대해 세계 각국의 지지를 얻는데 우리 재외공관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재외공관장들에게 당부했다.박 대통령은 또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확고한 억지력을 바탕으로 남북 간 신뢰를 하나하나 쌓아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려는 것”이라며 “신뢰는 서로가 룰과 약속을 지킬 때만 구축될 수 있는 것으로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룰과 약속을 어길 경우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이어 “지금까지 북한의 도발이 보상으로 이어지는 잘못된 악순환이 반복돼 왔지만 이제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며 “더 이상 도발에 대한 보상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