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염병과 역사

2021-11-12     매일일보
국립농업과학원
[매일일보] COVID-19가 일으키는 병이 전 세계에서 문제다. 이에 더해 전염병 전문가를 포함해 많은 연구자들이 사회.문화.경제적으로 이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파급되기 이전과 이후의 세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 예견한다.  이 견해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원인은 병 자체에 있지 않다. COVID-19 자체는 과거 문제를 일으켰던 병들에 비해 파괴력이 그리 높지 않다. 병 자체의 피해를 보았을 때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피해는 대항해 시대 중.남미에서 원주민들을 덮친 천연두나 홍역, 매독의 빠르고 광범위한 전파였다.  지금 전세계에서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지만 COVID-19로 인한 사망률은 감염자의 2.7% 정도로 추산되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보다도 1% 가량 낮다.  반면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 도착했을 당시 적어도 5천만명으로 추정되는 중남미의 원주민 인구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제국들을 무너뜨린 1520년부터 1세기도 안되는 1618년 중미, 남미 각각 170만, 160만으로 줄어들었다. 수치상으로는 93.4%의 사망률이지만 그 동안에도 출산이 계속 일어났을 것임을 생각해보면 사망률은 적어도 95% 이상으로 상승한다. 현재 COVID-19의 사망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치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숫자는 수백에 불과했으므로 비정상적으로 높은 사망률의 주된 원인은 전쟁 자체보다는 이들이 점령 후 자행한 혹독한 노동 착취와 스페인에서 같이 도착한 전염병이라 생각된다.  1347년부터 8년간 유럽과 러시아 서부를 휩쓴 흑사병은 원래 중국 서남부와 중앙아시아에서 조금씩 일어나던 풍토병이었는데, 이 지역은 원래 인구 밀도가 낮았기에 전염병이 폭증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당시 몽골제국이 러시아와 동부 유럽까지 진군하며 흑사병도 흑해 연안까지 이동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류 역사에서 대규모의 인력이 좁은 지역에 집중되는 전쟁 등의 사건이 일어나서 병력이 병이 퍼져 있지 않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 이들은 군대라기보다는 보균자 집단으로 봐야 할 만큼 도착하는 곳마다 병원체를 전파시키며 방어하는 입장에서도 대규모의 인력을 집중시키기에 병이 퍼지기 좋은 조건이 형성된다.  요즈음 '창궐'이라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전염병과 같이 이동하는 군대는 좀비 떼보다 더 위험한 존재였다. 좀비는 육안으로 구분이 되지만 중세 시대 보균자는 구분할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 상황에서 위생 관리는 나이팅게일 이전에는 생각도 않는 문제였기에 병 피해는 더욱 커진다. 이후 이 흑사병은 때마침 곡물 교역 차 흑해 항구에 도착한 제노바의 무역선에 옮겨져서 보균자와 흑사병에 감염된 쥐들을 가득 싣고 이탈리아에 상륙한다. 쥐들은 도시의 하수구 등 곳곳으로 퍼졌고, 거듭된 간접 전염은 유럽 인구 7천만명의 1/3 정도인 2천만에서 2천 5백만명을 죽인다. 전염병은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킨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중미와 남미에서 각각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해 유럽 제국과 아프리카에 팔려 했고 막대한 은광을 채굴하여 은괴를 제련하고 자국으로 들여오려 했는데, 둘 다 막대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분야였고 이윤을 극대화하려면 노예가 좋았다.  특히 당시 은은 은 원광을 납이나 수은-아말감 정련법으로 제련해서 순은괴를 만들었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시켜 은 원광을 가루로 부순 후 수은, 납과 버무려 포도주 만들 때 포도를 밟듯 맨발로 밟게 했다. 유독한 중금속 혼합물을 가열하고 덩어리로 만든 후 분쇄하는 과정 또한 아무 보호 장비 없이 수행했다. 원주민 노동자들은 이런 시련을 하루 15시간 이상 감수해야 했다. 식민지 시대 가장 유명한 은 광산은 현재는 볼리비아의 수도인 포토시 근방 고원에서 1545년 발견한 포토시 은광인데, 향후 50년간 이 은광은 전 세계 은 생산량의 반 이상을 점유했으며 이의 대가로 동원된 원주민 노동자 중 8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남미의 은 16,000톤 이상이 유럽으로 흘러든다. 포르투갈 인들은 사탕수수를 서인도제도와 브라질로 가져와 플랜테이션에서 대량으로 경작하고 이를 원료로 설탕을 만들어 유럽으로 수입했다. 1540년 이미 신대륙에는 설탕 정제소가 수십 군데 이상 가동 중이었다. 사탕수수 경작과 압착, 사탕수수 압착액을 원당 덩어리로 졸이는 것 또한 막대한 노동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거의 전멸했기에 노동력의 현지 수급은 불가능해졌다.  이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유럽의 공산품, 특히 철제 무기 등과 유리, 장신구 등의 사치품과 원당 가공 공정에서 나오는 당밀을 이용해 만든 럼 등의 술로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들여 중남미의 은, 설탕 생산에 투입했다. 남미의 은은 때마침 일조편법을 시행하여 모든 조세를 은으로 받기 시작한 명나라와 인도에서 향신료와 차, 찻잔, 식기 등 사치품을 구입하는 데에 사용했으며 이런 삼각무역으로 근대 유럽의 부르주아들은 산업 자본을 축적했다. 도자기는 비싼 물건이어서 중국에서도 일반적 수준의 대형 도자기는 은 100냥을 호가했고 같은 물건이 유럽에서는 수십배에 거래되었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은의 1/3이 명나라로 이동한다. 전형적인 삼각무역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전염병이 전파되는데 아프리카에서 남미로 말라리아와 뎅기열 등 전염병이 아프리카 노예와 함께 들어와 유럽인과 남미 원주민들을 괴롭혔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이 병들에 강했다. 당연히 넘쳐나는 노동력 수요는 더 많은 아프리카 노예를 요구했으며 비슷한 현상이 19세기 미국에서 목화 경작을 계기로 심화되어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신대륙에서 유럽의 병들이 창궐하기 1세기 전, 유럽은 흑사병으로 노동력의 반 이상을 잃었다. 이상한 것은 원래 인구 밀도가 희박한 중국 서남부와 중앙아시아 발 흑사병은 중국에서도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에 기여한다. 흑사병은 작년에도 내몽골 지역에서 감염자가 발생하며 문제가 된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소규모 풍토병 수준이었다. 중국과 이슬람은 유럽이 흑사병으로 붕괴되는 1340년대에는 흑사병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전문가들은 당시 주산업이었던 농업 시스템과 종교 교리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설명한다. 

중세 유럽의 농업은 삼포제(경작지를 봄 농사, 가을 농사 짓는 곳과 녹비 작물을 심어 지력을 회복시키는 곳으로 나누어 운영하는 농법)였지만 특히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던 중국 중남부에서는 2모작을 경영했다. 삼포제는 토지 이용 효율은 낮았지만 휴경지에 녹비 작물을 경작해서 지력을 보강하기에 퇴비를 줄 일이 없다. 상하수도 시설이 거의 전무하던 중세 유럽은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거리에 가축과 사람의 분뇨가 넘쳤고 가축을 기르는 곳에는 쥐가 들끓었다. 사람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와는 달리 청결을 중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도시 국가는 도시 전역에 화장실이 없었고 아침이 되면 창밖으로 요강을 뒤집었다. 
반면 2모작을 경영한 중국에서는 가축과 사람의 분뇨를 모두 수거한 후 퇴비로 만들어 지력을 증진시키는데 이용했고 당연히 거리는 깨끗했다. 도시와 인구 밀집 지역에는 대부분 수로 시설이 있어 생활하수를 처리했다. 풍부한 농업 생산은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시켰다. 많은 농부들은 쥐를 잡으려고 개나 고양이를 길렀다. 의도하지 않았던 위생적 환경이 흑사병 전파를 막는 데에 큰일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도 1368년 원명 교체기의 전쟁과 혼란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고 대규모 군대 이동과 기아, 민간인 학살은 전쟁이 집중되었던 지역에 흑사병을 불러온다. 이 시기 중국은 전쟁과 기아, 흑사병으로 전체 인구의 30%를 잃는다.  이슬람의 가르침에는 현대 질병 역학의 측면에서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 많다. 이슬람의 장로들은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으로의 방문, 특히 교역 행위를 금지시켰다. 흑사병이 발생했던 지역을 방문했거나 국지적으로 발병한 경우 접촉했던 생활용품과 의류를 모두 소각하고 모래 목욕을 하라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은 전염병 전파를 근본적으로 막았으며 청결하게 유지한 주변 환경은 감염자의 생존률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이들의 생활 환경이 쥐가 서식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하지만 정립되지 않은 검역 조건에서 계속되는 유럽과의 교역과 유럽 보균자들의 유입은 이슬람 교역 도시에도 큰 피해를 입힌다. 흑사병을 막지 못한 유럽에서는 노동력이 귀해졌고 사람들은 영주의 장원에서 도시 국가로 이동한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영주의 탄압에 반란으로 대항했다. 교회는 영향력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종교 개혁의 기반이 성립한다. 중개 무역으로 성장한 도시 국가에서는 자본이 축적되고 문화와 예술은 고대 로마와 그리스로의 복귀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흑사병은 유럽을 근대화시켰다. 전염병의 시각에서 바라본 역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보여 주지만 명확한 것은 전염병은 그 자체만으로는 위험하지 않으며, 전염병을 관리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질병 관리 체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관리 당국과 일반 시민의 정확한 정보 공유와 상황 판단, 그리고 민주적 시민의식이라는 점이다.  유럽의 마을 원로들과 일부 종교인들은 흑사병을 관리하기 위해 지저분한 하수구에 들어앉아 전염병을 버려서 낫기 전까지는 나오지 말라 했고, 불길한 고양이를 죽이라거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회초리로 자기 몸을 때리면서 마을에서 마을로 행진하라 했다. 제어할 수 없었던 남미의 천연두는 세 개의 제국을 무너뜨렸고 최소 수천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죽였다.  원주민들을 죽인 것은 전염병이 아니라 인간의 비뚤어진 탐욕이었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은 말 그대로 역사를 바꿨다. 환경과 병원체 전파 경로가 잘 관리된 중국과 이슬람에서조차 사회 체계의 붕괴는 흑사병의 피해를 일으켰다. 과거의 역사를 잘 기억하고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는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오늘이다.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명자원부 유전자공학과 농업연구사 안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