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2022-05-25 송병형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의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국민적 관심사는 백신이었다. 특히 백신 스와프를 체결해 한국의 집단면역을 앞당길 수 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권 입장에서는 꽉 막힌 북핵 협상의 물꼬를 트는 일이 다급했을 수 있겠지만, 임기를 1년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사안이다. 대선이 10개월도 남지 않은 정권이라면 눈앞에 닥친 당면과제에 집중하는 게 도리였다.
그런데 결국 백신 스와프는 없었다. 일방의 희망사항은 통하지 않는 냉엄한 국제정치 논리가 백신 문제라고 비켜갈 리 없다. 한국 정부가 ‘11월 집단면역’을 자신하는 상황에서 미국 입장에선 더 어려운 동맹국을 지원하는 게 당연한 선택이다. 미국 측이 한국군 55만 명 분의 백신을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생색내기용이다. 게다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군 내부에서 한미 연합군에 대해 ‘훈련 없는 군대’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던 것을 감안하면 백신 지원에 복선이 깔렸다는 말도 나온다.
국제정치는 냉혹한 현실 논리가 작용하지만 외교적 수사는 화려한 게 특징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예외는 아니다. 백신 위탁생산 계약 단 한 건에 한국이 ‘백신 허브국가’로 거듭났다. ‘세계의 백신공장’이 됐다는 놀라운 평가까지 나온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에서 백신 원액을 생산하는 게 아니다. 백신 원액을 들여와 충전하고 라벨링하고 포장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다. 물론 ‘무균 충전’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만큼 한국 기업의 기술력을 인정한 것이니 폄훼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세계의 백신공장’을 운운하기에는 아무래도 격이 맞지 않는 작업이다.
1년 넘게 코로나 사태로 고통 받는 국민들이나 생계가 막막해진 자영업자 입장에서는 ‘세계의 백신공장’과 같은 화려한 외교적 수사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백신을 맞는 게 절실한 문제다. 정작 한국 국민이 맞지 못한다면 ‘세계의 백신공장’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 정부의 설명을 들어보면, 위탁생산하는 모더나 백신을 예정보다 빨리 한국이 확보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유통과정을 단순화하는 게 기업에게 이익이 되니 한국의 백신 확보에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모호한 전망이 나올 뿐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외교에서는 ‘모호성’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한때 북핵 외교에서 ‘창조적 모호성’이라는 말이 유행했고, 대중 외교에선 얼마 전까지(어쩌면 지금도)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런데 이제는 백신 외교마저 ‘모호성’이 지배하고 있다. 백신 수급 계약이야 공급자가 갑(甲)인 세상이니 모호한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지만, 백신 외교마저 성과가 모호하니 답답한 일이다.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답답함은 더 커진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에서 아쉬운 게 백신이었다면 미국 측에선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5G·6G 등 한국으로부터 받고 싶은 게 더 많았다. 게다가 한국으로선 중국의 따가운 눈초리까지 의식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런 부담에도 한국은 삼성·SK·현대·LG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이 394억 달러(약 44조원)라는 통 큰 투자를 일거에 미국에 선물했다. 백신 위탁생산과 비교해 보면 저울이 기울어도 너무 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