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김동환 기자] 멈춰버린 국가 포르투갈에 이어 이번에는 다시, 움직이는 국가로 스위스를 두 편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스위스는 2021년 추산 1인당 GDP가 94,560달러로 세계 2위입니다. 룩셈부르크가 1위인데 벨기에, 프랑스, 독일에 둘러싸인 룩셈부르크는 서울 4배정도 크기의 사실상 도시국가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위스가 1위나 다름없습니다.
스위스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면적은 남한의 40% 남짓으로 경상도보다 조금 큽니다.
오랫동안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알프스 산맥으로 전 국토의 70%가 산이고, 호수를 합치면 75%입니다. 경작지가 25%뿐인데 그마저도 냉해가 심해 농사짓기가 어려웠습니다.
장남은 그나마 작은 땅이라도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그 외의 형제들은 먹고살기 위해 해외로 떠나야 했습니다.
해외로 간 사람들이 먹고 살았던 길은 용병이었습니다. 스위스 군인들의 용맹함은 오래전부터 정평이 나있었고,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살아서 폐활량이 뛰어나고 체력도 좋았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싸우느라 실전 경험도 많았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의 몸 값은 아주 비쌌지만 모든 왕가가 급할 때 이들을 찾았습니다. 유럽의 많은 전쟁 뒤에 이들이 있었는데, 이유는 바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혁명 때 루이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머물고 있던 파리 튈르뤼 궁으로 성난 민중들이 몰려왔습니다.
엄청난 군중에 겁먹은 왕의 근위병들은 도망쳤지만 한 부대만이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사상자가 속출하자 시민군들은 “퇴로를 열어줄 테니 돌아가라.”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 덕에 왕과 왕비는 궁을 빠져나갔습니다.
결국 786명의 부대원들은 전멸했습니다. 이들은 스위스 용병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무모한 싸움을 계속한 이유는 조국이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한 죽은 병사에게서 유서가 발견됐는데 “우리가 왕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우리 후손들은 아무도 용병으로 일하지 못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처럼 스위스 용병들은 계약을 지키기 위해선 몰살도 감수했습니다.
로마 교황이 있는 바티칸은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경비는 오직 스위스 용병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절대로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는 신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목숨을 팔아 연명했던 스위스가 어떻게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까요?
16세기 후반 프랑스에선 구교와 신교의 종교전쟁인 위그노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신교도들이 쯔빙글리와 칼뱅의 종교개혁으로 이미 신교가 굳건했던 스위스로 이주해왔습니다.
이때 넘어온 신교도 중엔 당대 최고 기술의 시계공들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또 이 시기 스위스엔 보석 가공 같은 정밀 수공업이 발달해 있었는데, 사치품을 금지하고 검소한 삶이 강조되던 종교개혁의 분위기 속에 예배시간 준수를 위해 사치품에서 제외된 시계 산업으로 대거 업종을 전환했습니다.
이들이 신교도 장인들에게 시계제작 기술을 배우고 여기에 세공업자 특유의 정밀함이 더해지자
품질이 뛰어난 시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좁고 험난한 산길이 많은 스위스는 부피가 크고 무거운 제품이었다면 운송이 어려워 내다 팔기 어려웠겠지만, 시계는 작고 가벼웠고 부가가치는 엄청났습니다.
상인들은 큰 가방에 시계를 가득 담아 알프스산맥을 넘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로 시계를 내다 팔아 큰돈을 벌었습니다.
용병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스위스 역사상 최초의 산업이 탄생한 겁니다.
18세기 후반에 제네바에서만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계 산업에서 일하며 연간 8만 5천개의 시계를 생산했습니다. 지금도 초고가의 명품시계로 세계를 휩쓰는 ‘시계의 나라’ 스위스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스위스 용병들이 아주 비쌌지만 많은 왕가들이 고용한 것처럼, 스위스 시계도 비쌌지만 높은 품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이러한 기조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만 판다.’는 것입니다.
한편 제약사업도 비슷한 과정으로 급성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알프스 산자락의 식물을 이용한 염색작업을 하다가 점차 진귀한 약초가 지천에 깔려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들은 연구를 거듭해 약초를 알약으로 만들어 알프스를 넘어 전 유럽에 내다 팔았습니다. 알약은 시계보다 가벼웠고 부가가치가 높아서 가방 하나로도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제약산업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날 신약발매 세계 1위 노바티스(Novartis), 항암치료제 세계 1위 로슈(Roshe) 같은 세계적인 제약기업이 성장했습니다.
스위스를 산업사회로 탈바꿈시켜준 일등공신으로 섬유산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방직기를 들여오면서 스위스는 본격적인 섬유산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으로 더 이상 기계를 들여올 수 없게 되자 위기를 맞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방직기를 직접 개발했고, 여기에 더해 사상 최초로 디젤 엔진을 달아 대량 생산을 하게 된 겁니다.
이 덕에 한 때 스위스의 섬유산업은 세계최고였습니다. 섬유는 물론 방직기계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1900년엔 전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섬유산업에 종사했습니다.
이 섬유산업의 발전과 수출에는 용병 출신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용병들은 유럽 여러 나라의
시장 사정에 밝았고, 이들을 신뢰하는 인맥들이 많아 쉽게 판로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용병의 신뢰가 거래의 신뢰로 이어진 겁니다.
<용병에서 시작된 스위스의 신뢰는 이처럼 무역에서 빛을 발하고, 현대에 와서는 금융업에서 또 한 번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