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일상 속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활동하고 일과를 마친 뒤 집에 돌아온다. 루틴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한 공간을 접한다. 그러나 실제로 머릿속에 기억되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오늘 하루 기억되는 공간은 어디인가? 회사 책상 앞, 점심 먹고 들렀던 카페, 아니면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교통수단 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하루 동안 다닌 공간이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더 기억되는 것은 작은 액정 화면에 담긴 다양한 정보가 아닐지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의 변화에 대한 생각을 제기해 본다.
공간이란 어떤 물질 또는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다. 물체가 존재한다는 물리적인 부분의 정의와 행동을 통해 어떠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추상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공간혁명’의 저자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 평론가인 세라 윌리엄스 골드헤이건은 지금 머무는 공간은 우리에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반드시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각자의 삶 속에서 본인이 선택하는 공간은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실리에 맞는 아파트에 사는지, 정원이 달린 주택에 사는지, 삼겸살에 소주 한잔을 할 수 있는 식당에 가는지, 치즈와 와인이 있는 와인바를 즐기는지 다양한 삶이 선택에 따라 구성된다.
그렇다면 기억되는 공간이란 무엇일까? 그 당시 사회를 보여줄 수 있는 장소나 일상 속에 밀접하게 다가 온 곳을 말 할 수 있다.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소로는 이집트의 왕권을 보여주는 피라미드나 로마의 정치와 경제 중심지로 자리잡았던 포룸 로마눔, 기독교의 확장을 통해 다양하게 지어진 교회들, 뉴욕과 같이 도시화로 생겨난 고층빌딩과 사이사이 자리잡은 현대식 공원들이 시대를 반영하는 곳으로 기억된다.
또 농경사회에는 농작물을 기르는 밭과 논, 산업시대에는 기계산업 공간과 운송수단이 일상 속에서 기억되는 공간이었다. 정보화 시대에는 컴퓨터를 기반으로 첨단 기기가 즐비한 오피스와 데이터가 난무하는 인터넷 사회의 SNS와 각종 플랫폼들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소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이러한 정보화 시대를 가속화시켰다. 앞으로는 액정만을 통해 접하는 것이 아닌 그 정보 속으로 들어가 체험하는 메타버스 세계가 활발히 실현될 것이다.
메타버스는 가상현실(VR), 증강현실(XR)로 이미 각종 산업에서 사용되고 있다. 구축해 놓은 가상공간에 언제 어디서든 접속해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가상현실의 기술적 부분이 아직 현실과 비교할 때 미흡한 건 사실이다. 보통 가상현실을 실행할 경우 프로그래머가 구축해 놓은 3D 시뮬레이션 공간 안에 VR기기를 통해 접속한다. 현실을 엇비슷하게 구현해 놓은 공간에서 눈과 귀로 체험한다. 공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오감을 통해서 제대로 이루어진다. 미흡한 감각 부분까지 제어가 가능한 기술을 구현한다면 앞으로 메타버스 속 공간과 현실 공간의 구별이 쉽지 않아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설계가가 구축한 메타버스 세상 안에서 다양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접속하는 채널의 종류에 따라 새로운 경험을 시간과 공간의 제한 없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과거 4대 성인을 만나러 갈 수도 있을 것이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미래의 삶을 미리 살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산업 발전에 따라 주목받고 기억되는 공간은 지속해서 변한다. 산업 환경과 일상의 변화를 통해 확장된 공간 영역이 생겨나고 있다.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축가의 입장에서 실재하는 물리적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화에 따른 새로운 가상공간 디자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기억되고 인식되는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로서만 존재하는 것뿐 아니라 생활환경, 매체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득 약 15년 전 학교에서 설문 조사를 한 기억이 떠오른다. 설문 내용은 게임 캐릭터가 현실 자아와 혼돈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우스운 질문’이라며 당연히 X를 적어 제출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설문지를 받는다면 과연 바로 X를 적어낼 수 있을까? 앞으로 우리는 현실 세계의 삶과 메타버스 속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