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이재영 기자]미중 갈등으로 한국 산업이 어려워진다는 얘기가 많다. 그런데 요즘 미국의 정치는 배울 것이 있다. 정치가 자국민의 이득을 위해 발빠르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온통 정쟁만이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는 현재 우리 정치 상황과 비교된다.
최근 미국 의회는 520억달러 규모 반도체 지원 법안 ‘칩플러스액트’를 통과시켰다. 반도체 제조시설 건설에 대한 직접 보조금 390억달러, 첨단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비 110억달러, 자동차 부품 부족 사태를 야기한 공급망 대책으로 기존 반도체 성숙 공정에 대한 보조금 20억달러 등이 법안에 포함돼 있다. 여러 산업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을 텐데 반도체에만 예산을 집중시키는 법안을 짠 것도, 그런 법을 의회가 통과시킨 것도 신선하다. 법안에는 25%의 반도체 시설 및 장비투자세액공제 혜택까지 포함돼 있다. 미국이 약해진 반도체 제조능력을 다시 살려 기술 패권을 방어하겠다는 국가적 목표가 확고하며 이를 위해 의회가 한마음으로 뭉쳤다.
법안에는 보조금 및 세액공제혜택을 받은 기업들은 향후 10년간 중국 및 타 요주의 국가 내 장비 도입과 증설 등 제조역량 확대 및 신설 투자를 금지하는 내용도 확인됐다. 우리로서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미국 보조금을 받을 시 중국 반도체 생산법인의 증설 투자를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걱정이 많다. 반도체 최대 수출 시장인 중국 시장 내 입지가 약해지거나 중국 정부의 반발 등이 우려된다.
지금은 일단 그런 문제를 떠나서 법안 자체의 기능만 보면 중국을 견제할 목적에 부합한다. 이런 법 조항이라면 인텔이 했던 미국 기업만을 위해 보조금을 써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회는 반박할 논리가 생긴다. 자국 이익을 위해 치밀한 법안을 만들고 다소 노골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의회의 의견이 일치했다는 점이 색다르다. 적어도 자국민을 위해 의회가 일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시장 내 빠르게 퍼지고 있던 중국 틱톡에 대해 개인정보 유출설을 제기한 바 있다. 이후 많은 미국민이 유튜브와 메타의 숏폼 동영상 플랫폼으로 갈아탔다. 인도의 틱톡 차단까지 이어져 지난 6월 기준 틱톡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4%까지 내려왔고 유튜브가 29%, 메타가 20%까지 성장했다고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상업가적 마인드가 높으며 보호무역에 적극적이었다.
지금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외교에서 보여주는 움직임도 트럼프와 크게 달라보이진 않는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를 위해 아시아 순방을 하고 반도체 법안을 밀어붙였으며 코로나19에 걸린 와중에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화상면담을 진행해 SK하이닉스의 대미 첫 반도체 투자 약속을 이끌어냈다. 우리로서는 얄미우면서도 추진력과 집요함에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에 비해 우리 정치에 대한 인상은 어떨까. 흔히 민생을 제쳐둔 권력다툼으로 묘사되고 있다. 경제정책엔 외교가 빠졌다. 방법은 궁리를 해야 생기는데 궁리 자체를 하지 않고 엄한 일에만 매달린다. 옛말에 제세경륜(濟世經綸)이라고 했다. 세상을 건지는 정치라는 말이다.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제세경륜하는 것이 종착지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