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작금의 국제 정치는 그동안 지리적 위치 중심의 지정학(地政學 │ Geopolitics) 시대에서 이제는 과학적 기술 중심의 기정학(技政學 │ Tech-politics) 시대로 급격히 이동하고 이는 다시 이들을 융합한 지경학(地經學 │ Geo-economics) 시대로 급속히 진화하고 있다. 바야흐로 글로벌 가치사슬(GVC │ Global Value Chain)의 ‘뉴노멀(New Normal)’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외교와 통상의 벽이 무너지는 ‘경제 안보(Economic security)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미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주요국들이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내 공급망 강화 기조로 태세를 전환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주의 체제와 글로벌화(Globalization)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특히, 중국경제력의 성장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의 교란이 촉발한 공급망 위기를 절실히 경험한 세계 각국은 ‘가치사슬(Value chain) 재구축’에 나섰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분위기에 결정적 가속(t加速) 펀치 날렸다.
이렇듯 오늘날 주요국들이 ‘경제 안보(Economic security)’ 정책을 명분으로 채택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통치술(Economic statecraft)은 기존의 다자무역규범과 잦은 충돌과 함께 지역 차원 및 소다자적 형태의 무역 규범 수립을 통해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의 형성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조 바이든(Joe Biden) 행정부 들어 ‘반도체 내셔널리즘’은 노골화했다. 지난해 4월 12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은 삼성전자를 포함한 19개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초청해 진행한 ‘백악관 반도체 공급대책 회의’에서, 직접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올리며 “반도체는 21세기 편자의 못”이라는 말과 함께 기술 패권을 차지하려는 미국의 의지를 세상에 각인시켰다. 이어 지난 5월 20일 방한한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이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을 찾아 ‘반도체 동맹’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지난 7월 19일 한국을 방문한 재닛 옐런(Janet Louise Yellen) 미국 재무장관도 방한 첫날 서울 강서구 마곡의 LG화학 연구개발 시설을 찾아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 │ 우방국간 공급망 구축)’을 언급하며 “공급망 강화를 위해 주요 우방과 경제 협력을 굳건히 해야 하고, 여기엔 한국도 포함된다.”라고 말했다.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은 친구(Friend)와 기업 생산시설(Shoring)의 합성어로 우방국끼리 뭉쳐 주요 제조업 생산을 위한 공급망을 함께 구축하자는 의미로 우방국이 아닌 나라는 공급망에서 배제하거나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은 중국과의 패권전쟁이 격화하면서 줄곧 ‘리쇼어링(Reshoring │ 해외 생산시설 본국 회귀)을 추진했으나 역부족을 느끼고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통해 세계 무역 질서 재편을 시도하고 나섰다.
이어 지난 8월 4일 한국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미국 하원의장도 이날 오후 2시 30분부터 약 40분간 윤석열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의장과 동행한 ‘수잔 델베네(Suzan Del Bene)’ 연방 하원의원은 윤 대통령에게 “'반도체 칩과 과학법(반도체법)’을 언급, "양국이 수혜를 누리며 협력 방안을 논의하자”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치킨게임(Chicken Game │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경쟁)’ 양상을 치닫고 있어 ‘샌드위치 신세’인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눈치 보기에 급급해졌다. 정부가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 ‘칩(chip)4’ 예비 회의에 참석하기로 하면서 중국의 보복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특정 국가를 배제하거나 폐쇄적인 모임을 만들 생각이 없다.”라고 밝힌 것은 이를 방증하기에 충분하다.
미국의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 체제에서 가장 핵심적인 아이템은 당연히 반도체다. 미국은 한국·대만·일본을 묶어 이른바 ‘칩(Chip)4 동맹’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며, 이미 지난 3월 이들 국가에 “‘칩(Chip)4 동맹’을 결성하자”라고 제안했다. ‘칩(Chip)’은 반도체를, ‘4’는 동맹국 숫자를 뜻한다. 우리 정부에 “동맹 참여 여부를 8월 말까지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 능한 미국과 메모리 반도체 생산 강국인 한국과 파운드리(Foundry │ 위탁생산) 분야에서 세계 1위인 대만, 소재·부품·장비 분야 강국인 일본 등을 묶어 반도체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미국의 ‘칩(Chip)4’ 동맹 제안은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의 전략적 산물로 동맹이 이뤄지면 미국은 중국에 대한 불안감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이를 달가워할 리 만무하다. 중국의 관영매체 환구시보와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미국 주도 ‘칩(chip)4’에 한국 참여가 거론되는 것에 대해 “한국은 미국의 위협에 맞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라면서 “중국 시장과 단절하는 것은 ‘상업적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다.”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칩(chip)4’ 참여 요청에 굴복한다면 득보다 실이 클 것임은 분명하다.”라고도 압박했다. 사드(THAAD │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이후 한국 정부와 기업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기억이 소환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최우선 미래 전략은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 정책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면서 패권을 지속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일대일로(一帶五路 │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신실크로드)’ 정책을 통해 세계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과 기존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 사이에서 한국은 이러한 전략적 모호(模糊不清)함을 돌파하는 데 보다 노련하고 한층 세련되고 더욱 의연하고 좀 더 주도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역사의 흐름에 고비가 있듯 시간의 흐름에는 마디가 있다. 그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을 하느냐에 국가의 명운이 달려있고, 그 고비와 마디를 어떻게 이용하고 활용하느냐가 국가의 발전과 퇴보를 좌우한다. 따라서 좀 더 많은 초격차 기술을 개발하여 발전시키고, 이전보다 전략적으로 공급망 위험을 유연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정부의 현명한 대처와 외교 역량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아직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3%에 그치는 후발주자일 뿐이다. 한국을 뺀 나머지 국가들이 ‘그들만의 리그’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가 기술 경쟁에서 설 자리는 급속도로 좁아질 수밖에 없다.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친구(Friend)는 없다. 미국이 초기 ‘동맹 쇼어링(Ally shoring)’이라고 사용하던 용어를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으로 바꾼 진정한 의도를 명찰하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국익을 앞서는 우정은 상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우호 관계가 이런 결정에 중요한 검토 요인임을 부인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일본·대만 등 소위 친구(Friend) 국가들의 선택은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 굳어지는 신냉전 구도 등의 국제 흐름까지 주도면밀히 살피고 분석하고 뽑아낸 손익계산서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한국을 뺀 나머지 국가들이 ‘그들만의 리그’로 움직인다면 한국은 기술 경쟁에서 설 자리가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반발과 보복 가능성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미국이 한국에 반도체 공급망 ‘칩(Chip)4동맹’ 참여를 요구한 데 대해 지난 7월 19일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세계 경제가 깊이 융합된 상황에서 미국 측의 이런 행태는 흐름을 거스르는 것으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라고 압박한 것을 가볍게만 넘길 사안이 결단코 아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중국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25%를 차지했다. 중국으로 수출하는 상위 10개 품목 중에서 반도체가 전체의 30.8%를 차지하며 가장 많았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은 1,280억 달러(약 168조 원)를 기록했는데, 이 중 중국에 대한 수출은 502억 달러(약 66조 원)로 39%를 차지했다. 홍콩까지 합치면 대중 수출 규모는 60%에 육박한다고 한다. 중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더욱 걱정스러운 대목은 흔들리는 중국 수출이다. 중국과의 무역수지는 지난 5~6월에 이어 7월에도 5억7,5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우리나라 전체 무역 적자가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이 늘면서 발생하는 데 반해서 대중 무역 적자는 수출 자체가 감소한 데 기인한다는 점에서 걱정을 더 키운다. 지난해 같은 달보다 2.5% 감소했다. 중국과의 무역수지가 석 달 연속 적자를 낸 것은 1992년 8~10월 이후 30년 만이다. 지난 30여 년간 중국이라는 ‘거인’의 등에 올라타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한국 경제가 ‘차이나 굴기’와 ‘칩(Chip)4 동맹’ 참여로 인해 선진국 문턱에서 미끄러질 수 있다는 우려가 당연히 커지고 있다.
‘산업의 쌀’이라 일컫는 반도체의 기술을 둘러싼 미·중 패권 다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아슬아슬한 줄타기 곡예는 필연이며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7월 21일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먼저 기업 투자를 총력 지원해 5년간 340조 원 이상의 투자를 끌어낸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과감한 인프라 지원, 규제 특례로 반도체 기업 투자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계획이다. 치열한 패권 다툼의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적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반도체 기술에서 뒤처지면 기술 속국의 나락으로 추락할 것은 자명하다. 치열한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도록 적극적·지속적인 대책을 강구해 나가야만 한다. 근대화에 뒤처져 일본 등 열강의 먹잇감이 됐던 구한말의 뼈아픈 역사가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한국은 ‘칩(chip)4’가입 여부에 대해 8월 말까지 답변을 내놔야 한다. 이를 앞두고 고심을 거듭하는 상황이지만 정부가 선택할 여지가 크지는 않아 보인다. 정부 고민이 크겠지만 국익을 위한 결단은 필요하다.
그야말로 난제 중의 난제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국익의 관점에서 최종 판단이 섰다면 결정을 머뭇거리거나 좌고우면할 필요는 없다. 올해 5월 23일 공식 출범한‘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가입을 발표하면서 “초반에 들어가야 기존의 규칙을 따라가는 ‘룰 테이커(Rule taker)’가 아니라 규칙을 만들어가는 ‘룰 메이커(Rule maker)’가 될 수 있다.”라고 한 정부 말대로 우리 실익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판단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해야만 한다. 프렌드(친구) 없는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에 프렌들리(친한) 관계보다 국가 이익을 최우선에 둔 관점에서 유연한 선제적·주도적 대응을 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박근종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