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이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 4.3은 특별해" -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영화와 책으로 만날 수 없는 가족을 잇다 박찬욱, 고레에다 히로카즈, 김윤석, 양익준 극찬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감독 양영희, 한국에서 먼저 출간하는 첫 산문집
누군가는 양영희를 두고 제 식구들 이야기를 꽤나 오래 우려먹는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양영희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한참 더 우려먹어주세요.” (…)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의 이전 작품들처럼 우리가 오래도록 곱씹어야 할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양영희는 계속 우려먹고 우리는 계속 곱씹어야 합니다. _박찬욱 감독 추천의 말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영화와 책으로 만날 수 없는 가족을 잇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국내 개봉에 앞서 양영희 감독과 마음산책은 긴밀히 산문집 구상에 들어갔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며 아버지 – (분신과도 같은 조카 선화를 포함한) 북의 가족들 – 어머니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번 책에는 영화 바깥의 뒷이야기와 촬영 에피소드, 차마 말하지 못했던 내밀한 일화들까지 더해지면서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의 진정한 완성을 이루었다.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직계가족에서도 벗어나고 싶은데 타인과 새로운 가족을 만들라니, 제정신인가. 아버지의 딸, 오빠들의 여동생, 여성, 재일코리안 같은 명사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이유도, 도망치기보다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_「미국 놈, 일본 놈, 조선 사람」 중에서, 31쪽
<디어 평양>을 공개하자 조총련은 북한을 부정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감독에게 사과문을 강요하지만, 이를 거부하자 북한 입국을 금지한다. 양영희는 분노와 반발심을 응축시켜 4년 뒤 보란 듯이 사과문 대신 <굿바이, 평양>을 발표함으로써 부당한 조치에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천명한다.양영희감독은 작가의 말에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아무리 귀찮아도 만날 수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가족이다"라고 썼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공유함으로써,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가족은 연결되어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 4.3은 특별해"
개인의 비극을 넘어선,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는 전작들에서 가족과 일가친척을 위해 헌신하는 '가장'의 모습으로 등장하다, 2018년이 되어서야 덮어두었던 기억의 뚜껑을 열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오사카에서 나고 자랐지만 1945년 오사카 대공습을 피해 제주도로 건너갔다. 열여덟이 되던 1948년 4월, 제주4.3사건의 끔찍한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뒤 어린 동생 둘을 데리고 밀항선에 올라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그 이후로 마음속에서 남한의 존재를 지운 채 살아간다. 연고라고는 없던 북한을 지지하고 맹목적으로 조총련 활동을 하던 부모에 대한 의문은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이르러서야 풀린다. 한국에서도 오랜 시간 금기시되어온 제주4.3사건은 한 가족의 삶에, 나아가 한반도와 재일코리안의 역사에 거둘 수 없는 잿빛 그늘을 드리웠다. 한국에서 찾아온 제주4.3연구소의 연구자들 앞에서 증언을 마친 그날 이후, 어머니의 알츠하이머는 급속하게 진행된다. 여기에 타이밍 좋게 등장한 아라이 카오루라는 존재는 가족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친 양영희에게 새로운 가족을 선사한다.- 조선 국적의 어머니, 한국 국적의 딸, 일본 국적의 남편. 세 사람이 함께 뜨거운 닭 백숙의 수프(국물)를 나눠 먹으면서 꽁꽁 언 이데올로기는 비로소 녹아내린다.-
양영희 감독이 전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고,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애쓰고, 미래의 희망으로 이어가겠다는 그의 다짐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개인적인 체험을 넘어 시대와 인종을 불문하고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는 관객과 독자들에게 원형적 정서를 체험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