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도 덮친 자금경색…너도나도 高금리 CP 발행 '악순환'
자금난 속 기업어음 금리 금융위기 이후 처음 '5%' 도달
13년만에 최고 금리에도 회사채 경색에 조달 수요 몰려
2023-11-09 이광표 기자
[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단기자금시장 투자 심리를 나타내는 지표인 기업어음(CP) 금리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연 5.0%를 기록했다. 최근 기업들이 자금 조달 수단으로 CP 시장에 몰린 영향으로 풀이된다.
채권시장에서는 단기자금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CP 금리 상승은 레고랜드 사태 후 기관들의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된 상황에서 신용불안 등의 우려 역시 커지고 있는 점이 원인으로 꼽힌다.
대기업들도 CP 시장으로 몰리면서 금리가 매일 연고점을 경신하고 있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은데다 발행 절차가 간편하고, 민평금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장점에 CP 시장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경기 침체가 확실시되면서 운용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조달 수요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9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신용등급 A1 기준 CP 91일물 금리는 이날 오전 11시30분 기준 전 거래일보다 0.02%포인트 오른 연 5.0%로 집계됐다. 지난 9월21일(3.13%) 이후 거래일 기준 33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CP 금리가 연 5.0%가 된 건 글로벌 금융위기였던 지난 2009년 1월15일(5.0%) 이후 13년10개월 만이다.
CP 금리는 올해 1월3일 연 1.55%에 불과했으나 2.09%(5월26일), 3.01%(8월25일), 4.02%(10월 19일) 등 가파르게 올랐다. 중앙은행의 긴축 기조에 금리가 올라가던 추세였는데, 최근 기업들이 자금 조달 수단으로 CP 시장에 몰린 영향이다.
긴축 기조 지속에 금리가 상승세였는데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고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이 속출한 영향이다. 담보 없이 신용으로 발행되는 CP는 발행 절차가 복잡하지 않고, 금리와 만기를 쉽게 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최상위 신용등급인 기업도 연 5~6%대 CP 금리를 제시해야 투자자를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우려가 나온다.
SK그룹이 대표적이다. SK㈜는 10일 3년물 CP와 5년물 CP를 각각 1000억원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SK(주)가 장기 CP 발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SK네트웍스는 44일물 1000억원어치를, 롯데건설은 6개월물 490억원어치를 각각 발행했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기가 침체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선제적으로 운용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기업들이 CP 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라며 "회사채 시장에서는 한국전력 때문에 자금 조달이 쉽지 않지만, CP 시장에서는 대기업의 경우 장기물(1년 이상) 발행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CP 시장을 찾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CP는 회사채와 달리 이사회 결의가 필요없다. 또 신용등급 평가를 받지 않아도 된다. 절차상 회사채보다 간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두 번째로 CP 발행은 민평금리(민간채권평가사 평균 평가금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윤원태 SK증권 연구원은 "회사채 금리는 '민평금리+a'로 결정되는데, 한 번 발행하면 금리가 잘 안 움직여 다음 회사채 금리에 영향을 준다"라며 "반면 CP 금리는 민평테이블과 관계없기 때문에 발행 기업의 부담이 덜하다"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회사채 시장의 자금 경색난도 큰 요인 중 하나다. 그동안 초우량 등급(AAA)인 한전 회사채가 연 5~6% 안팎의 높은 금리를 제시하며 시장의 자금을 쓸어갔다. 앞서 재계 관계자가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이유로 '한전'을 꼬집은 이유다. 그러나 강원도의 '레고랜드 ABCP' 지급 보증 사태로 시장이 충격에 빠지자, 최근 한국전력 회사채도 일부 유찰될 정도로 투자심리가 얼어붙었다.
이 때문에 회사채 시장보다 상대적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으기 쉬운 CP 시장으로 기업들이 눈을 돌렸다는 분석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금리가 더 높은 CP가 더 유리하다는 평가다.
다만 금융권 관계자는 "금통위에서 기준금리 인상이 기정사실화된 만큼 CP 가격이 하락하면 투자자에게도 손해이기 때문에 CP 발행 금리가 관건"이라며 "대기업들이 장기 CP를 발행하는 것이 좋은 시그널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금융당국은 지난달 23일 50조원 이상 유동성 지원조치를 발표하고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가동에 나섰다. 또 지난주부터 CP를 중심으로 매입에 나섰지만 CP금리는 연일 연고점을 경신하는 등 약세가 계속되는 분위기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기업의 차환 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CP 발행이 어려워지면 레포(Repo) 시장의 결제불이행 위험이 증가하고, 머니마켓펀드(MMF)에서 자산 급매 현상이 관찰돼 채권시장과 주식시장 전반으로 위험이 확산할 가능성이 있다"며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되면서 금융회사들도 자금 운용과 조달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