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유럽판 IRA 예고에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 고조
美 IRA에 반발한 EU, 핵심원자재법 입법추진 움직임
EU 원자재 공급망 강화 의도…韓 배터리·車 영향줄 듯
정부 “무역차별요소 낮아”…EU에 WTO·FTA 합치 강조
2022-12-01 이상래 기자
[매일일보 이상래 기자] 유럽연합(EU)의 ‘핵심원자재법(CRMA)’ 입법추진에 글로벌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안(IRA)’의 유럽버전 예고에 우리나라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해지고 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EU의 핵심원자재법 입법추진 향방에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이 예의주시하고 있다.
EU의 핵심원자재법은 미국의 IRA에 대한 반격 카드다. EU 소속 국가에서는 미국의 IRA가 자국의 기업에 불이익을 주고 있다며 반발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IRA를 두고 “기업인에게 매우 공격적”이라며 “(프랑스의)많은 일자리를 죽일 것”이라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로베르트 하베크 독일 부총리도 “미국에서 생산돼야 한다는 규정은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준과 양립이 불가능하다”라며 “EU는 비슷한 조처로 응수하겠다”라고 했다.
문제는 미국과 유럽의 싸움에 우리나라 기업들의 글로벌 지정학 불확실성만 커졌다는 점이다. EU 핵심원자재법 내용이 아직 구체화된 건 아니다. 핵심원자재법이 미국 IRA의 EU 반격카드인 만큼 제정될 새 법안에 IRA와 유사한 내용이 담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IRA처럼 전략적 핵심원자재를 선정해 EU의 해외 자원·부품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내용이 담긴다는 것이다.
IRA의 경우 우리나라 배터리와 자동차 업계의 미국 시장 공략에 영향을 주고 있다. 상황은 온도차가 있다. 배터리 업계는 IRA 불확실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미국 IRA는 우리에게 굉장히 좋은 사업 기회”라며 “오랜기간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주요 전략 업체와 현지화를 진행해 탈중국화 대비해왔다”라고 밝혔다. 삼성SDI 관계자도 “IRA 발표 이후에는 더 다양하고 큰 규모의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를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했다.
반면, 현대자동차는 IRA가 부담스럽다. 장재훈 현대차 최고경영자(CEO, 사장)는 지난달 조지아주 전기차 공장 기공식에서 가진 CNBC 인터뷰에서 IRA 관련해 “우려스럽고 매우 도전적인 이슈가 될 것”이라며 “단기적으로 IRA는 고객들의 선택에서 우리에게 다소 제약을 가져올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EU의 핵심원자재법도 앞선 IRA처럼 배터리와 자동차 업계의 유럽 시장 공략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단 배터리 업계에겐 핵심원자재법이 IRA처럼 크진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 모두 유럽 현지에 생산기지를 보유하면서다. LG엔솔은 폴란드에, 삼성SDI와 SK온은 헝가리에 공장을 가동 중이다. 배터리 업계에겐 EU의 핵심원자재법 영향이 제한적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역시 IRA처럼 유럽시장 공략의 새로운 기회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완성차 업계에겐 핵심원자재법 불확실성이 큰 상황이다. 핵심원자재법의 세부조항이 어떻게 제정되느냐에 따라 이해득실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전기차의 경우 IRA처럼 전기차 보조금 지급 조건이 까다로워질 경우 유럽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우려도 있다.
현재 정부는 핵심원자재법이 우리나라 산업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는 보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달 29일 기자들을 만나 핵심원자재법에 대해 “EU가 WTO 등 다자 통상 규범 준수를 강조하고 투명한 역내 입법 절차를 고려해 무역 차별적인 요소가 포함된 조치를 낼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라고 전망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EU의 핵심원자재법 입법 동향 파악과 대응에 신속하게 나선다는 방침이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프랑스 파리에서 올리비에 베쉬트 프랑스 통상장관을 만나 EU 핵심원자재법 우리 기업에 차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WTO와 자유무역협정(FTA)에 합치되게 설계해 달라고 요청했다. 산업부는 지난달 EU 집행위원회에 핵심원자재법이 외국 기업을 차별하거나 부담을 가중시켜서는 안 되며, 공급망 실사규정 등 EU의 기존 규제안과 WTO·FTA 규정에 합치돼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