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 공포…기업들 회사채 발행 통해 현금확보 안간힘
1월 회사채 발행 계획 규모 6조원 육박...전월比 70%↑
"시장 유동성 회복 아직"...채권시장 수급 불균형 우려
2024-01-05 이광표 기자
[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새해 벽두부터 대기업들이 자금 조달을 위해 줄줄이 회사채 시장을 찾고 있다. 지난해 금리인상이 거듭되면서 회사채 시장의 자금경색이 심해지자 자금조달 계획을 미뤄둔 기업들이 올 초 들어 회사채 시장을 찾아 경쟁적으로 자금확보에 나서는 모습이다.
다만 대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레고랜드 사태’ 이후 간신히 안정을 찾았던 채권시장이 다시금 공급 과잉 상태에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도 고개를 들고 있다.
5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업들의 회사채 발행 계획 규모는 최대 5조7500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 이후 자금시장이 얼어붙으면서 회사채 발행 규모는 10월 3조6871억 원, 11월 2조8322억 원, 12월 3조4019억 원에 그쳤다. 기업들이 1월 계획한 대로 회사채 전액(최대치 기준) 발행에 성공한다면 발행량은 지난해 10∼12월 평균 대비 70% 이상 늘게 된다.
4일 KT가 최대 3000억 원, 이마트가 최대 4000억 원의 회사채 발행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포스코 역시 최대 7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준비 중이다. LG유플러스, 롯데제과, 현대제철, CJ ENM, GS에너지, LG화학 등도 회사채로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다.
올해 경제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자 대기업들이 사전에 이를 대비하기 위해 연초부터 회사채 발행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20조원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등 정부 지원책과 기관투자가들이 올해 초 본격적인 투자를 재개할 것이란 ‘연초 효과’에 대한 기대도 회사채 발행을 서두르게 만든 배경이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은행 대출과 기업어음(CP) 발행 등 회사채를 대체할 자금 조달 수단이 녹록지 않다 보니 결국 회사채 발행에 나서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
통상 1~2월은 기관투자가들이 자금집행을 재개해 시장에 투자자금이 몰리는 '연초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시중금리가 하향 안정세를 보이는 등 투자심리도 회복되고 있는 흐름이다. 인플레이션 '피크아웃'(고점통과) 기대감이 커지면서 미국 등 주요국의 금리인상 속도가 둔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서다. 신용등급 AA- 무보증 회사채 3년물 금리는 이날 기준 5.262%를 기록, 지난해 10월 고점(5.736%)을 찍고 47.4bp(1bp=0.01%포인트) 낮아졌다. BBB- 회사채 금리는 같은기간 11.591%에서 11.201%로 39bp 빠졌다.
전문가들은 우량물 중심의 강세를 전망했다. 지난해 채안펀드 가동에 연초효과가 겹치며 회사채 신용 스프레드는 180bp(1bp=0.01%p)에서 150bp 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신용 스프레드가 줄어들면 기업의 자금조달 난도가 낮아져 기관투자자들의 채권 투자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설명이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하반기 크레딧 시장이 냉각되면서 주요 발행이 대부분 취소됐고, 이에 따라 발행 대기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며 "금리 인상 속도 조절론과 시중 금리의 하락, 초우량 등급 스프레드의 가파른 축소세로 저가 매수세가 유입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11월 말과 12월 초에 실시한 SK와 SK텔레콤의 회사채 수요예측이 흥행에 성공한 점과 투자심리 회복세가 이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우량 대기업도 발행물량을 원활히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수급 측면에서도 연초 기관들의 자금 집행 재개로 수요 기반이 확충되는 가운데 은행채 등의 물량 조절이 예상되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불안 요인도 여전하다. 연초에 만기 도래를 앞둔 회사채 차환 수요가 많고, 한전채 등 공사채의 발행 규모가 다시 늘어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일반 회사채 규모는 총 59조1000억원이다. 이 중 1분기 만기 도래 규모는 14조700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이후 자금 경색이 심화됐던 채권 시장에 다시금 수급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시장의 유동성이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시중은행들도 은행채 발행을 재개하고 있으며, 공사채 발행도 늘어날 조짐이 보인다.
임재균 KB증권 연구원은 "최근 크레디트 시장의 투자심리가 회복된 이유 중 하나는 채권 신규 발행량이 감소하면서 시장에 공급이 줄었기 때문도 있다"며 "발행물량이 늘어나면 수급 균형이 악화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시장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발행 물량은 쏟아지면서 ‘옥석 가리기’가 한층 더 치열해질 거로 보고 있다. 우량 등급의 공공기관 채권과 대기업 회사채에만 자금이 몰리고, 그 외에는 자금이 가지 않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재발할 가능성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