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이른바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가 미·중 패권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신냉전시대의 전략무기로 떠 오른 가운데 세계는 지금 국가의 사활을 건 글로벌 반도체 전쟁으로 치열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된 반도체 공급 불안은 경제 안보상 각국의 ‘반도체 자국 우선주의’ 글로벌 흐름을 발현(發現)시켰다.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대만, 유럽연합(EU) 등 반도체 강국들은 수십조 원에서 수백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며 국가 진운(進運)의 명운(命運)을 건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수십 년 동안 지켜온 시장주의 원칙까지 깨트리면서 수천억 원의 보조금은 물론 세제 혜택 등을 무기 삼아 ‘반도체 생산 내재화(Chips Inside)’에 서둘러 나선 데 이어 중국의 ‘반도체 굴기(中国崛起 │ 우뚝 솟음)’를 제지하기 위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까지 흔들면서 중국으로 향하는 반도체 장비 수출규제까지 단행했다. 일본 정부도 잃어버린 반도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보란 듯이 대만의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의 공사 기간을 당초 5년에서 2년으로 앞당기려고 4조6,200억 원가량의 보조금을 투입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현장에서 기업들이 부닥치는 벽마저 낮지 않다. 2019년 2월 120조 원을 들여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겠다고 발표한 SK하이닉스는 용지·용수 문제 해결에만 3년 넘게 걸렸고 4년 만에야 첫 삽을 뜰 수 있게 됐다. 415만 m²(약 125만 평) 부지에 조성되는 클러스터에는 SK하이닉스와 협력사 50여 곳이 입주할 예정으로 2027년 준공이 목표지만 인근 지자체의 반대를 겪으면서 환경영향평가에만 2년 가까이 걸렸고 결국 산업통상자원부와 여당이 나선 끝에 지난해 11월에야 문제 해결 실타래를 풀었다. 삼성전자 역시 경기 평택 반도체 공장을 지으면서 안성시의 반대로 전력을 공급하지 못할 상황에 처해 송전선로 건설 사업에만 5년이나 중단되다 2019년에야 합의점을 찾았다. 합의에 따른 추가 비용만도 750억 원이나 삼성전자가 떠안았다.
미국을 비롯한 일본 대만 등에서 정부와 기업이 손잡고 반도체 공급망 확보에 공격적으로 총력전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도 민관 협력이 강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하다. 업계는 최소 내년 상반기까지는 메모리반도체 수요 하락세가 이어지고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점유율이 하락하는 ‘보릿고개’가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다. 특히 올해 1월 4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이차전지(Battery)·바이오(Bio)·반도체(Chip) 등 이른바 ‘BBC 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BBC 제조기업의 공급망 체감도 조사’에 따르면 ‘BBC 기업’ 10곳 중 7곳이 새해에도 공급망 위기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신성장 분야인 파운드리(Foundry │ 반도체 위탁생산) 투자 경쟁도 더욱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반도체 기업들의 국내 설비 투자를 충분히 지원하지 못하고 있어 반도체 공급망 약화가 우려된다는 지적이 들끓고 있다. 이렇듯 전 세계가 일분일초를 다투는 숨 가쁜 글로벌 초격차 경쟁의 속도전을 벌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적극적 지원이라곤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엄중한 시기에 정부나 국회의 대응에서는 그 어떠한 절박감이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이 반도체 시설 투자에 25%의 세액공제를, 중국은 100%까지 공제해 주는 등 전 세계가 반도체 지원에 사활을 걸고 촌각을 다투는 데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K-칩스법(반도체특별법 │ 「조세특례제한법」)’은 그보다 현저히 낮은 기존 6%에서 2%포인트 올린 8% 세제 혜택만 주도록 했다. 여당의 20%(안), 야당의 10%(안)보다 낮은 8%로 최종 결정됐는데 그 이유는 세금이 덜 걷힐 걸 걱정한 기획재정부의 반대 때문이라고 한다. 거센 비판이 일자 지난해 12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은 세제지원 추가 확대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정부는 부랴부랴 반도체 대기업의 투자세액공제율을 대기업엔 최대 25%까지, 중소기업엔 최대 35%까지 올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급기야 지난 1월 3일 국무회의에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가전략기술의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상향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안에 따르면 우선 반도체, 배터리, 백신, 디스플레이 등 국가전략기술의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대기업 기준으로 현행 8%에서 15%로 올라간다. 중견기업 역시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5%에서 25%로 대폭 상향 조정된다. 이 같은 지원 방안은 올해 1월 1일 투자분부터 소급 적용할 수 있도록 입법을 추진한다. 나아가 투자 증가분에 대한 10%의 추가 세액 공제 혜택까지 줄 방침이어서 시설 투자세액공제율은 최대 25%(대기업)∼35%(중소기업)까지 올라간다. 정부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이달 중 마련해 최대한 빨리 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하지만 국회 통과 과정에서 야당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해 보인다. 반도체산업 육성을 그렇게 강조하더니 야당을 설득하기는커녕 야당의 10%(안)보다 더 낮은 8% 공제율에 합의해 버린 대목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법인세를 인하하면 시설투자를 유도해 고용과 수출을 늘리고, 기업의 경영 실적을 호전시켜 세수를 더 늘릴 수 있다는 자신들의 논리까지 내팽개쳐 버린 처사였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안)은 기존 야당이 제시한 10%(안)보다 새로운 개정(안)의 공제율이 훨씬 높을 뿐만 아니라 이미 여야가 합의한 것을 불과 11일 만에 다시 개정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명분 싸움에서도 여당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2024년 법인세수가 한꺼번에 3조6,000억 원이 넘게 줄어드는 것도 국가 재정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전쟁이 개별 기업 간 경쟁을 넘어 국가 간 사활을 건 전면전이자 총력전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이 경쟁국들에 밀리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국회는 여·야를 불문하고 반도체 전쟁에 국가 진운(進運)의 명운(命運)을 걸어야 한다. 특히 여당은 야당을 설득하는 데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 야당 역시 정부 여당의 발목을 잡아야 할 것은 잡더라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놓쳐서는 안 된다. 국가전략기술산업 육성에는 정부와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근종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 / 서울시자치구공단이사장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