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대도박' 대북사업 지각변동 불렀다

현 회장 섣부른 승부수 정부개입 촉발, 북측 행보 촉각

2006-09-16     권민경 기자

북한, 롯데, 삼성 등에 개성관광 제의 현대에 등 돌리나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KCC와 경영권 분쟁을 벌여 승리했던 현정은 화장. 그녀가 지금 최대의 기로에 서 있다. 대북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과의 경영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위기를 불렀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현 회장이 개인비리를 명분으로 김 부회장을 일선에서 퇴진시킨 이후 대북사업은 냉기류에 휩싸이고 있다. 북한측은 김 부회장 퇴진을 빌미 삼아 대북사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현 회장을 강도높게 압박하고 있다. 이에 현 회장은 대북사업을 접을 수 도 있다는 폭탄발언으로 북한측을 진노케 했다. 현 회장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여론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대체적으로 여승부사로서의 기질을 발휘했다는 시각과 한 그룹을 이끄는 총수로서 신중치 못했다는 행동이라는 반응이 양분되고 있다. 과연, 현 회장의 대도박은 성공할 수 있을까. 북한은 물론 국내 정치권과 재계는 현 회장의 다음 수순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김윤규 부회장 퇴진으로 불거진 현대와 북한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12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그룹 홈페이지에 '국민 여러분께 올리는 글'을 통해 대북사업 수행과정에서 비리혐의로 퇴진한 김 부회장을 복직시킬 생각이 없음을 단호하게 밝힌 이후 현대그룹과 북한간 냉기류가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날 현 회장은 '국민여러분께 올리는 글'에서 "16년간 대북사업을 보필했던 사람을 물러나게 한 것은 자신의 이익이나 오만함 때문이 아닌 대북사업의 미래를 위한 '읍참마속'의 결단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북측이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는 김 부회장 복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현 회장은 특히 "남북한의 경제 협력은 상호간의 정직한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며 사업을 수행하는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는 "저는 이제 대북사업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것 같다" 며 "하지만 이것은 정주영 회장님과 정몽헌 회장님의 필생의 사업이셨고, 온 국민이 염원하는 통일 사업이기에 저 혼자 결정할 수만은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고 말했다.현 회장의 이 같은 폭탄 선언의 배경은 북한측이 개성관광 사업을 롯데관광 측에 제의한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북한에 대한 경고성 발언이나 다름없는 현 회장의 폭탄 선언 이후 현대와 북한간 냉기류가 심화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가 대북사업 개입을 시사하고 나서면서 대북사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곧바로 수습에 나선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현 회장의 성급한 발언으로 조정 여지를 줄였다" 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또 앞으로 정부가 대북사업에 개입할 것임을 밝혀 남북경협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양상이다.이에 따라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의 대북협상 전략 틀이 완전히 바뀌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북사업과 현대그룹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해 실제로 현 회장이 대북사업을 포기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현대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김 부회장 건에 대한 북측의 태도가 변하지 않고 있지만 여러 경로로 북한을 설득하고 있으며 개성관광을 위한 실무협상도 계속 진행되고 있어 대북사업을 차질없이 추진해 나갈 것" 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현 회장의 전격적인 입장 표명으로 인해 현대 아산의 대북 사업은 더욱 혼란한 양상으로 빠지게 됐다. 북한은 지난 8월 25일 금강산 관광을 축소한 데 이어 개성 본 관광과 백두산 시범 관광에 대한 협상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현대아산에 따르면 지난 13일 개성 본관광 협상을 위해 임원진이 개성을 방문해지만 별다른 협상을 이루어지지 않았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끝난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그동안 현대그룹에 독점적인 지위를 부여했던 북한이 롯데관광 측에 개성관광 사업을 제한한 것으로 알려져 파장은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이는 북한이 더 이상 현대의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롯데 관광 관계자는 지난 13일 "북측이 지난 8월말 평양에서 열린 '2005평양오픈골프대회' 참관 차 평양을 찾은 김기병 회장에게 개성 관광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구두로 해왔다" 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현재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수익성이 있는지 따져보고 있으며 북측에서 조만간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고 덧붙였다. 롯데관광 측은 이보다 앞서 지난 1990년대 초와 김대중 정부시절인 1999년에도 대북사업제의를 받은 적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대 측은 이에 대해 "개성관광은 지난 2000년 북측과 맺은 7대사업독점권에 적시된 것으로 현대가 독점권을 갖고 있다" 고 반발했다. 정부는 그 동안 현대아산 문제에 대해 개입불가 원칙을 내세워 왔다. 통일부 관계자는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초반부터 예의주시하고 있다" 며 "그러나 민간기업의 인사문제에 정부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한나라당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현대 대북사업이 커다란 암초에 부딪친 지금 정부가 슬기롭고 이성적인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 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 지난 14일 제16차 남북장관급 회담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대북사업과 관련 현 회장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정부의 개입 의지를 밝힌 것이다.정 장관은 현대와 북한간의 갈등으로 위기에 봉착한 상황과 관련, "현 회장이 정부의 조정, 중재 여지를 줄였다" 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정 장관은 "정부도 걱정되는 바가 커서 오기 전에 현 회장을 만나 중재해볼까 타진했는데 그 다음날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해 여지가 줄어들었다" 고 말했다. 이어 "금강산 관광은 정부의 희생과 지원이 있었고 국민의 세금이 들어간 사업" 이라며 "정부로서 해야 할 몫"이 있다고 말해 정부의 개입 의지를 밝힌 것이다. 정 장관의 이런 발언은 대북사업은 공적기금이 투입된 사업이므로 현 회장 마음대로 중단할 사안이 아니라는 속뜻도 담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정 장관의 발언을 통해 현대와 북한 간의 금강산 사업이 민간 차원의 사업이라며 개입을 꺼린 정부의 태도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는 자칫 북한과의 갈등에 이어 정부와도 미묘한 갈등에 휩싸일 상황에 처한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김 부회장이 지난 12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자격으로 LA를 방문한 자리에서 "대북사업은 어느 누구의 개인 사업이 아닌 민족, 국가적 사업" 이며 "대북사업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북측과 연결시켜주겠다" 는 발언이 보도돼 현 회장의 읍참마속에 응수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됐다. 한편 현 회장의 이 같은 초 강수 대응은 이대로 북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갈 경우 대북사업의 수익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북이 개성 본 관광에서 요구하는 1인당 150달러의 관광대가를 들어줄 경우 현대아산이 거둘 수 있는 수익은 없다" 고 밝혔다. 현대는 이미 금강산 사업 대가로만 북측에 9억 4천2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일방적인 퍼주기 방식을 유지해 왔으나 이제는 수익성을 고려하는 쪽으로 대북사업을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현대아산은 최근 한화국토개발에 금강산, 개성관광 공동투자를 제의했다. 이미 금강산 콘도 건립을 추진 중인 한화개발을 개성관광에 끌어들여 투자 부담을 줄일 수 있고 한화측은 레저사업 경험을 살려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거라는 예측에서다.현대 측은 또 앞으로도 관광, 레저업체와 유통업체 등에 대북사업 기회를 제공할 예정이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대북사업이 국가, 민족적 차원이기 때문에 수익성만 고려할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는 사업성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밝혔다. 현 회장의 이런 '정공법', 정도경영' 이 북한 측에는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현 회장은 현대그룹의 경영권 자리다툼에서도 '원칙'과 대국민 호소로 경영권을 방어한 경험이 있다. 현 회장이 대북사업에 있어서도 이 같은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북한의 미움을 샀다는 것이다. 12일 현 회장이 올린 글에 대해서도 "대담한 판단력에 감탄한다" ,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북한에 끌려간다면 현대그룹이 아니다. 이번 결단은 잘한 것" 이라는 등의 격려 의견이 올라온 반면 "현대는 대북사업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중이었는데, 신중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이 시점에서 성급한 표현이었다" 는 지적도 있었다. 또 현 회장의 이런 대응이 명분을 앞세워 국민을 상대로 홍보하는 것이라는 강한 비판도 있다. 사정이 어찌됐든 이제껏 독점계약을 바탕으로 추진돼온 현대의 대북사업이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위기에 놓인 것은 사실이다. 북측이 롯데관광 측에 개성관광사업을 해보라 제의한 것은 향후 다른 사업자와도 대북 사업을 할 의지가 있음을 밝힌 것이어서 대북사업은 중대 기로에 선 것이다. 북측의 의도는 여전히 정확하게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과연 북측이 더 이상 현대아산의 대북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롯데관광을 통해 현대아산에 경고를 보내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북한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향후 대북사업에 있어 더 많은 경제적 실리를 챙기고자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이 공통된 분석이다. 물론 롯데관광이 실제 개성 관광을 성사시킬지 여부도 아직은 불투명하다. 대북관계의 특성상 정치, 사회적 변수가 너무도 많아 한 치 앞도 예측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남북교류협력법상 롯데관광이 개성관광 사업을 통일부로부터 승인받기는 까다로운 상황이다. 교류협력법 17조1항3호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협력사업과 심각한 경쟁을 유발할 가능성이 없을 것"을 남북경협 승인조건으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분명한 것은 북측이 사업 파트너를 다양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럿의 파트너를 두고 협상을 벌이는 것이 관광비용 대가를 조정하는 등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 회장의 정면돌파 방법이 향후 현대에게 철저한 비즈니스를 바탕으로 한 대북사업을 가능케 할지, 최악의 경우 대북사업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악영향을 가져올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