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쇠퇴의 길을 걷는 19세기 독일 사회의 충복들 『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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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쇠퇴의 길을 걷는 19세기 독일 사회의 충복들 『충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24.08.0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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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 김종혁 기자  |  [신간 『충복』은 '토마스 만'의 형인 저자 '하인리히 만'의 대표작이다. 문학을 통한 예술적 자아 성장을 중요시한 동생과 다르게 독일 사회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참여문학적 입장을 견지했다.

19세기 후반 독일 사회를 통치한 빌헬름 2세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려는 시민 계급, 사상가, 노동자를 풍자적으로 그렸다.

'충복'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 지음 | 남기철 옮김 | 781쪽

1871년 독일제국은 무력으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제1대 황제 빌헬름 1세 치하,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내실을 기하며 대외 확장에 소극적이던 독일제국의 외교 국방 정책은 1888년, 빌헬름 2세가 제3대 황제에 등극하며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던 젊은 황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친정 체제를 구축하며 '민족주의' 기치를 내걸고 해군 군사력을 강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펴 나간다. 이로써 유럽 전역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한다.

한편 1848년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혁명의 파도가 몰아칠 때, 독일의 시민 계급은 제대로 된 혁명을 경험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비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비약적으로 이루어져 일부 시민 계급이 자본력을 갖추며 황실 및 귀족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게 된다.

이들이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 몰두하는 가운데 경제 발전에서 소외된 노동자 계급은 파업과 시위로 거리에 나서며 독일제국에 혼란이 닥친다.

하인리히 만은 이 빌헬름 2세 시대를 배경으로 황제의 충복을 자처하는 시민 계급 디데리히 헤슬링과 사회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당시 독일제국 사회의 정치, 법률, 경제, 종교, 예술, 연애, 결혼, 문화 전반의 비리와 부조리, 부패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풍자했다.

디데리히는 어린 시절, 약하고 겁이 많은 아이였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힘 있는 무서운 자들에 대한 공포심과 동경심이 자라난다. 성인이 된 디데리히에게 젊은 황제는 권력의 상징, 그 자체다. 그는 절대 권력자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 스스로도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하는 처세술을 익혀 가며 점점 권력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하인리히 만은 1906년경부터 이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14년 7월초에 탈고했다. 이 소설에서 그는 정확히 전쟁을 예측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설 마지막에 전쟁에 대한 암시를 뚜렷이 내보인다.

디데리히 헤슬링과 불코프 주지사가 추진한 빌헬름 황제 기념비의 제막식 날, 마른하늘에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점점 거세지는 폭우와 바람으로 기념비 제막식을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워지자, 황실에서 나온 고위 관료들은 물론이고 귀족, 군 장교, 시민 계급, 성직자, 교인, 노동자까지 너나없이 제막식장에서 저 먼저 빠져나가겠다고 밀치고 당기면서 아우성을 친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비바람에 펄럭이는 제국의 삼색기를 《신약 성경》의 〈묵시록〉에 나오는 기사들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기사들은 최후 심판의 날을 대비해 이제 겨우 예행연습을 했을 뿐”이라고 서술한다.

하인리히 만은 소설이 완성되기 전인 1914년 1월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잡지 《차이트 임 빌트》에 이 소설을 연재해 부분적으로 발표하다가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연재를 중단했다.

1918년 12월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출간 이후 채 6개월이 되기 전에 10만 부가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1951년 독일에서 영화로도 제작됐다. 이후 지금까지 연극과 뮤지컬로 무대에 자주 오르고 있다.

지은이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은 1871년 3월 북부 독일의 뤼베크시에서, 곡물 회사를 운영하며 시 의회 의원을 지낸 부친과 남미 출신 모친의 다섯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벨상 수상 작가 토마스 만이 그의 동생이다.

뤼베크의 김나지움 중퇴 후 드레스덴의 서점에서 견습 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1890년부터 1892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했다. 1892년부터 자유주의 성향의 잡지 《현재》에 비평과 에세이를 발표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891년 부친의 사망 이후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에 전념했고, 어머니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894년 첫 소설 《어떤 가족에서》가 출간됐다. 1895년부터 이듬해까지 월간지 《20세기》에서 편집인으로 일하고,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머물면서 작품 구상을 한다.

이 시기에 작가는 두 나라의 사상과 문학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의 두 번째 소설 《게으름뱅이의 천국》이 이 시기에 완성됐고, 《여신들》도 구상했다. 1899년부터 1914년까지 뮌헨, 베를린, 이탈리아에 살면서 《작은 도시》, 《애정 추적》,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 등을 발표했다.

1919년에 작가의 첫 수필집 《권력과 인간》이 출간됐다. “독일공화국에 바침”이라는 헌사가 붙은, 독일의 역사와 철학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작가의 견해가 담긴 수필집이다. 작가는 여기서 독일 제국과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민족주의 사상이 독일 사회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마르공화국 사회의 시대상을 그린 《어머니 마리》, 《유제니》, 《대사건》을 집필했다. 1928년, 당시 유럽 예술의 수도 격이었던 베를린으로 이주해 1930년 프로이센 예술원 문예 부문 총재를 맡았다. 그의 소설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1930년에 ‘푸른 천사’라는 제목으로 제작돼 미국과 독일에서 상영됐다.

히틀러가 독일 수상에 임명되기 전, 그를 비판하는 선언문에 서명했던 하인리히 만은 1933년 히틀러가 수상 자리에 오르면서 예술원 회원 자격을 박탈당한다. 곧이어 국적마저 박탈당한 하인리히 만은 독일을 떠나 프랑스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프랑스 망명 시절에 쓴 대표 작품으로 장편 역사 소설 《앙리 4세의 청년기》와 《앙리 4세의 완성기》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동독 예술원 총재로 선임됐으나 귀국 직전, 당시 망명 중이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서 사망했다.

옮긴이 남기철은 건국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지금은 독일어권의 문학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한다. 《한밤의 도박》, 《우체국 아가씨》, 《타라바스》, 《테레제, 어느 여인의 일대기》, 《글 쓰는 여자의 공간》, 《우아하게 걱정하는 연습》, 《완벽의 배신》, 《아이를 낳아도 행복한 프랑스 육아》, 《에로틱 세계사》, 《거의 모든 시간의 역사》 등을 번역했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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