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B.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토마스 만, 앙리 베르그송, 펄 벅, 헤르만 헤세, T.S. 엘리엇, 버트런드 러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존 스타인벡, 새뮤얼 베게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블로 네루다, 귄터 그라스···.
이 빛나는 이름들의 공통점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이다. 그 이름만으로 세계 문학사를 상징한다. 시내 대형서점이든 인터넷 서점이든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을유문화사, 문학동네, 민음사 등등 오랜 출판사들의 '세계문학전집'에 등장하는 그 이름들을.
그 책들은 판매량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학전집은 원래 판매량이 저조하다. 그래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위대하기 때문이다. '클래식'이라는 이름이 갖는 막강한 권위. 문학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꿈과 사랑, 사람의 희망과 절망, 사람의 욕망과 좌절, 사람의 신념과 배신, 사람의 삶과 죽음. 사람이 이룬 역사와 그것을 이루는 일상에 대한 작가들의 기록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간직해야 할 유산이다.
121번째 노벨 문학상 주인공이 한강 작가다. 지금까지 노벨위원회가 인정하는 문학은 따로 존재하는 줄로만 알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순수문학이란 단어 자체가 촌스럽게 느껴진다. 필요하면 웹소설, 웹툰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종이에 인쇄된 출판 문화의 기억들이 희미해져만 가는데, 문학이라니. 그것도 '한국 문학'이라니···.
15일 기준 국내에서만 100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 판매량은 최초의 한국 노벨상이라는 이슈에 기댄 유행 이상일 것이다. 경이로움이다. 노벨상 작가들은 다른 세계 사람들이라고, 헤밍웨이나 카뮈처럼 교과서에나 보는 이름일 줄 알았겠지만 알고 보니 바로 우리 옆에 있었다.
어쩌면 버스에서, 마트에서, 커피숍에서 마주쳤을지 모를 바로 우리와 같은 국경, 같은 도심,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너무도 친숙한 중년 선생님 또는 아주머니의 모습으로···.
출판계 사람들은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한강', 허영만 화백의 장편 시리즈 '한강'도 덩달아 검색량에서 특수를 누리고 있다고 전한다. 모두가 훌륭한 작품들이다. 아니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위대할지 모를 작품들이다.
문학은 우리들의 이야기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살아온 역사가 출발점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들도 포함된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을 거론하며 5·18 민주화운동, 4·3 사건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보수 정치에 익숙해진 또는 뉴라이트의 흐름에 이끌리는 이들이다.
우리 가까이 어떤 사람들은 한 세대가 넘도록 또는 한 세기가 가깝도록 고통을 품고 있다. 쉽게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비웃고 싶다면 도전해야 한다. 맨부커? 아니 국내 문학상, 오늘의 신인상부터. '자유' 민주주의니까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인내의 시간은 본인들의 몫이다.
한강 작가가 진정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은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한 재발견이다. 뒤늦게나마 다시 주목하게 된다. 사랑이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그 누구든, 언젠가 한강 작가와 함께 세계문학전집에 이름을 올릴지 모른다. 마음껏 사랑하자. 서점에 가서 열심히 책을 사자. 한강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