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가 85년간 길어 올린 철학의 정수
매일일보 = 김종혁 기자 |
한국 철학계의 거목,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85년간 몰두한 치열한 사유의 증거
현실을 떠난 철학은 없다는 의미가 없다는 신념 아래 가장 현실적인 철학을 탐구하는 데 몰두한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의 책이 출간됐다.
이 책은 올해 85세를 맞아 자신만의 사유로 오롯이 채운 철학서를 펴내고자 하는 오랜 열망을 이뤄낸 것이다. 85년간 현실과 씨름하며 한 문장씩 길어낸 철학의 정수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서구 철학을 마구잡이로 수용하며 맥락 없는 사유를 펼치는 과정에서 철학이 대중을 떠났다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처럼, 한국의 현실을 몸으로 부딪치며 치열하게 쌓아 올린 독자적인 철학은 더욱 큰 울림을 전한다.
진정한 철학은 현실의 문제에 응답하며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철학은 당시 시대를 대변하며 시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즉 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며 철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을 알려준다.
불가지론이나 허무주의의 유행이 사람들의 마음을 잠깐 흔드는 한이 있더라도, 철학은 언제나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한국의 현실에서 비롯한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 책은, 이를 길잡이 삼아 우리가 꿈꾸는 시대로 나아가도록 지침을 보여준다.
책상물림 ‘철학 공부’는 멈추고 현실적으로 ‘철학’하라!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의 진정한 쓸모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자의 수만큼이나 그 대답은 다양하겠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든 철학은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그 시대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치열하게 사유하고 그 해답을 내놓았다.
제자백가 시절 통치론에 입각한 철학이 대두되었던 것도, 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감성이냐 이성이냐 하며 서양 근대 철학자들이 다투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즉 철학은 시대의 요청을 받아 그 시대가 지침 삼아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철학의 이미지는 고리타분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머리 아픈 이야기만 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철학이 우리의 땅에서 스스로 파종한 한국의 철학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인 이명현 교수는 말한다.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과 상응하며 그 쓸모를 다하는데, 우리의 철학은 한국의 문제가 아닌 서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을 받아들여 ‘철학 공부’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철학이 영원불멸한 진리를 탐구한다는 오해와 대학 철학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안락의자 철학’은 이런 선입견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현실적인 철학은 어떤 모습일까? 그 첫걸음은 대답이 없는 질문에 천착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꾸만 ‘왜?’라고 묻는 철학자의 모습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현실의 문제에 제대로 응답하는 철학을 제시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대답이 없는 물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을 묻지 않는 것은 인간의 성숙이요 인간의 지혜다.” 즉, 답이 나오지 않는 무용한 질문을 던지는 철학은 그만두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을 하자는 말이다.
허무주의의 열병, 자생적 철학의 부재를 이겨내는
독자적 사유로 쌓아 올린 아포리즘
국내 가장 존경받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마저 “단언컨대 천재”라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느라 저작을 통해 대중을 만날 기회가 적었다.
하지만 올해 85세를 맞아 자신만의 사유로만 쌓아 올린 책을 남기고 싶다는 오랜 소망을 이 책을 통해 이뤄냈다. 철학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의 대전제를 바탕으로, 8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치열하게 고민한 사유의 흔적은 한 문장 한 문장 큰 울림을 준다.
예를 들어, “인간은 변화가 가능한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절대’와 ‘허무’는 시간 밖에서 가능한 개념이다. 따라서 ‘절대’도 ‘허무’도 인간 존재의 밖에서 가능한 개념일 뿐이다.” 같은 문장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일갈하며, “사색의 미로는 사람을 사로잡고 우리는 그 미로에서 방황한다. 마치 병에 갇힌 파리가 훤히 열려 있는 출구를 보지 못한 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같은 문장은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해답을 무시하고 철학의 탈을 쓴 쓸모없는 고뇌에 빠진 사람들에게 내리치는 죽비와도 같다.
또한 저자는 교육부장관을 역임하며 한국의 교육 체제의 변화를 이끌며 철학과 실천의 합일을 보여준 바가 있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기획하고 실행했던 교육 체제 변화의 바탕에 있는 신문법과 신철학을 해설한다.
신문법과 신철학의 목적은 철학적 언어가 철학자들만의 ‘방언’이 되어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된 오늘날의 상황을 타개하고, 누구나 철학적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생적 철학’의 부재로 맥락 없이 수입한 외국의 철학이 시대에 잘못된 길을 알려주고, 허무주의의 열병이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세태를 극복할 지혜를 전한다.
서양 근대 철학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마구잡이로 수입한 철학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 곳곳을 병들게 했는지 차근차근 풀어내고, 다시금 한국의 현실에 맞는 철학은 무엇일지 신중하게 엮어낸다.
지은이 현우(玄愚) 이명현은 서울대학교 철학과 학사 및 석사를 졸업하고 브라운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훔볼트재단(Humboldt-Stiftung) 석학회원(fellow),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를 지냈으며 현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다. 제37대 교육부장관,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2008년 제22회 세계철학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아 아시아권에서 최초로 열린 세계철학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현 계간지 《철학과현실》의 발행인이며 재단법인 심경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쓴 책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보통사람을 위한 철학』, 『열린마음 열린세상』, 『(이명현 신작칼럼)길아닌 것이 길이다』, 『이성과 언어』,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전개』, 『신문법 서설』, 『사회변혁과 철학』(공저), 『현대철학특강』, 『새 문명 새 철학』, 『교육혁명』, 『아름다운 세상』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칼 포퍼』, 『현대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 2』, 『사회변혁과 철학』이 있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