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도둑 들어간다 교수실 문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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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들어간다 교수실 문 열어라
  • 류세나 기자
  • 승인 2008.05.23 1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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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행세하며 여교수실만 골라 턴 이상한‘도둑’사연

절도 9범, 지난해 10월 출소 뒤 입에 풀칠 위해 ‘또’ 절도
‘여교수실 전문 털이범’으로 경찰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인’
진짜 교수처럼(?) 점수 매긴 시험지 늘 옆구리에 끼고 다녀

[매일일보닷컴] 근엄한 표정에 검은 뿔테안경, 단정한 트렌치코트, 한손에는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 50대 초반의 중년신사가 바쁜 걸음으로 대학 교수실에서 나온다. 수업시간을 수면시간으로 만들어 버릴 듯한 고리타분한 느낌을 주는 영락없는 ‘교수님’ 인상이다. 옷이 날개라고 했던가. 알고 보니 이 중년남성의 실체는 교수가 아닌 바로 ‘좀도둑’이었다.

서울 성북경찰서는 지난 19일 교수 행세를 하며 여교수 연구실만 골라 털어온 혐의로 손모(51)씨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특히 손씨는 만일을 위한 신분확인 도구로 교수실에서 훔친 시험지를 소지하고 다니는 등 완벽한(?) 범죄를 꿈꿔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4월 서울소재의 한 사립대학교 ㅇㅇ과 조교실에 한 중년남성이 찾아와 “나 △△대학교 아무개 교순데, 김 교수 자리에 있나”라고 물었다. 조교는 이 중년남성의 인상으로 보나, 행색으로 보나 ‘김 교수와 친분이 있는 교수’가 맞다고 판단하고 강의시간표를 알려줬고, 이윽고 그는 자리를 떠났다.

그 후로 몇 시간 뒤, 김 교수 연구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김 교수가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와 보니 문은 훼손돼있고 핸드백 속에 들어있던 현금, 신용카드는 물론 노트북, 디지털 카메라 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범인은 바로 ‘△△대학교 아무개 교수’를 자칭했던 절도범 손씨.

손씨는 이 같은 방법으로 지난 2월부터 최근까지 총 14회에 걸쳐 서울∙경기지역 대학교 교수실에 침입, 현금과 신용카드 등 약 1,300백여만원 상당품을 절취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손씨는 여 교수들이 수업에 들어갈 때 주로 핸드백을 연구실에 두고 간다는 점을 노리고 교수들이 강의에 들어간 낮 시간대를 이용해 범행을 벌여왔다.

교수실 입구마다 교수 이름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여교수의 연구실을 찾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모든 학교의 여교수 연구실이 손씨의 범행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거물급 대도 (大盜)가 아닌 좀도둑 수준이었던 손씨에겐 방범장치가 연결된 문이나 철문 등을 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손씨는 발품을 팔아 표적이 될 수 있는, ‘출입문이 나무로 된’ 교수실을 찾아 나섰고, 나무문으로 된 교수실이 손씨의 범행대상이 됐다.

보통 나무문은 강도가 약해 드라이버를 이용해 손잡이를 쉽게 뜯어낼 수 있고, 문 틈새가 넓어 신분증・신용카드 등 딱딱한 것으로 문고리에 가벼운 충격을 주면 저절로 열리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특별한 기술 없이도 쉽게 문을 열수 있다는 얘기다.

일관된 범행 스타일 탓에 덜미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 손씨는 특가법 절도 등으로 경찰서와 교도소를 수시로 들락거린 전과9범의 상습 절도범이다.

지난 2004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대학교 교수실에서 상습적으로 절도행각을 벌이다 검거,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지난해 10월에 출소했다. 그러나 3년간의 복역기간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 손씨는 출소 4개월 만에 또 다시 작업(?)에 나섰다가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이와 관련 손씨는 “먹고 살아야 하는데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또 다시 도둑질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이제 와서 이 나이에 새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없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이것(도둑질)밖에 없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진술대로 10여년 간 그가 입에 풀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절도’ 행각이었다. 1997년 IMF가 닥쳐올 무렵 골프강사로 활동하고 있던 손씨는 경기가 어려워지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이후 ‘편하게’ 돈을 버는 방법을 택했다.

손씨는 베테랑 ‘교수실 전문털이범’답게 범행현장에는 지문은 물론 범인을 특정할만한 어떠한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찰에 덜미를 잡히게 됐을까. 문제(?)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항상 같은 수법으로 범행을 벌여오던 손씨의 범죄성향에 있었다.

경찰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교수들의 절도신고 접수를 받은 경찰은 ‘여교수실 전문 털이범’에 관한 범행일람과 범행수법 등을 전국의 경찰들이 공유하는 서버에 올려놓았다. 당시 경찰은 범인에 대한 어떠한 신상정보도, 용의자로 특정할 만한 인물 등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사건은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과거 교수실 전문털이범 손씨의 담당 경찰 제보로 용의자를 특정할 수 있었던 것. 범행수법은 물론 교도소 출소 시기 또한 피의자 손씨의 경우와 맞아 떨어졌다. 이에 경찰은 인천 애인의 집에 은신 중이던 손씨의 행적을 파악한 후 잠복․검거,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범행대상에게 직접 전화하는 대담함도 보여

조사결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손씨의 범행수법은 단순했으나 교수실 무단침입․절도 이후의 행동은 ‘교활’했다.

훔친 카드나 통장에 비밀번호가 적혀져 있는 경우에는 돈을 빼내기 쉬웠다. 그러나 비밀번호가 될 만한 단서가 전혀 없는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해당 교수에게 전화를 거는 대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ㅇㅇ카드(▲▲은행)인데 혹시 카드분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카드 정지를 위해선 비밀번호가 필요한데, 비밀번호를 알려주시면 지금 즉시 사용정지 처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카드분실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에 의문을 나타낼 법도 했지만 “도둑 맞았다”는 당혹감에 교수들은 범인일 것이란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순순히’ 비밀번호를 알려줬고, 손씨는 손쉽게 돈을 인출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행방을 감추기 위해 공중전화를 이용해 전화를 거는 ‘기본’도 잊지 않았다.

이 같은 방법으로 피의자 손씨는 지난 4월 3일 서울 동선동 소재 S대학교 박모(58)교수의 연구실을 침입해 절취한 신용카드 3매로 현금 500만원을 인출했다.

손씨의 교활한 범행방법은 절취품 목록에서도 드러난다. 손씨는 지난 3월 20일 부천 역곡동의 K대학교 교수휴게실에 침입해 서류꽂이에 꼽혀 있던 영어학습테스트지 89매 분량을 훔쳤다. 팔아도 돈이 되지 않을 시험지를 훔친 이유는 무엇일까. 조사결과 드러난 이유는 ‘진짜 교수’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손씨 애인의 집에서 확보한 손씨의 소지품 중 채점이 돼있는 영어시험지를 발견, 추궁한 결과 교수행세를 하기 위해 스스로 영어테스트지에 빨간펜으로 점수를 매겨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는 손씨의 진술을 받았다.

훔친 ‘부정한’ 돈, 자식 교육비로 사용

경찰조사결과 드러난 또 한 가지 사실은 손씨는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아빠’였다는 것. 교수실을 털어 얻어진 수입의 대부분을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의 교육비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에 따르면 손씨는 잠시 만났던(?) 여인이 원치 않는 임심을 하게 돼 결혼까지 하게 됐지만 계획된 결혼이 아니었기에 둘은 곧 이혼을 했다. 하지만 손씨와 자식의 인연은 거기서 끊기지 않았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얻게 된 자식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뻤던 손씨는 교도소를 전전하면서도 사회에 있는 동안 절도를 통해 얻어진 수입을 자식의 교육비로 송금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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