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이태민 기자 | 게임업계의 자료들을 톺아보며 인상 깊게 다가왔던 단어는 '상생'이다. 매일 수치를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현장에선 다소 낯선 단어이기 때문이다. 설령 기업을 알리기 위한 미사여구일지언정 산업계를 출입한 이래 오랜만에 마주한 그 단어가 퍽 반가웠다.
하지만 최근 게임업계의 상생에 균열이 가고 있다. 국내 게임사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게임 콘텐츠·디자인 등을 표절했다는 저작권 침해 논란이 잇따라 발생하면서다.
엔씨소프트는 지난달 서울중앙지방법원과 대만 지혜재산및상업법원에 카카오게임즈와 레드랩게임즈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및 부정 경쟁 행위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엔씨 측은 레드랩게임즈가 개발하고 카카오게임즈가 퍼블리싱하는 신작 게임 ‘롬(ROM)’이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장르가 갖는 공통적·일반적 특성을 벗어나 창작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리니지W를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레드랩게임즈는 “통상적인 게임 디자인 범위 내에 있는 내용"이라고 반박했다.
게임업계의 지식재산권(IP) 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엔씨는 지난 2021년 웹젠의 모바일 MMORPG 'R2M'이 '리니지M'을 표절했다며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애도 엑스엘게임즈가 개발하고 카카오게임즈가 서비스한 '아키에이지 워'가 '리니지2M'을 다수 모방했다며 저작권 침해와 부정경쟁행위에 대한 소송을 내기도 했다. 넥슨과 아이언메이스도 게임 '다크 앤 다커'를 두고 지난해부터 법정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분쟁의 쟁점은 저작권 보호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다. 그동안 캐릭터나 스토리, 세계관 등 시각적 요소에 대해서만 유사성을 판단했기 때문에 게임 장르 및 사용자 인터페이스(UI)·사용자 경험(UX), 플레이 방식 등 시스템·아이디어 요소는 저작권 보호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대법원이 기존에 고수해 오던 입장과는 조금 다른 판결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기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실적 악화로 인기 IP가 업체 경쟁력을 좌우하게 된 만큼 업계 내 갈등은 한동안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이는 저작권과 같이 실체가 없는 지식재산을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하지만 지리한 공방전으로 국내 게임사 간 신뢰 붕괴와 산업 성장 정체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은 다소 우려스럽다. 특히 이들은 오랜 시간 선의의 경쟁을 통해 글로벌 게임 경쟁력을 키워왔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무엇보다 판결 결과에 따라 그동안 해오던 게임이 갑자기 중단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용자가 떠안게 된다. 결국 게임업계 분쟁이 장기화되면 산업·국가적 손실과 사회적 비용 발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게임사들이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펼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각 게임사가 피땀으로 일군 IP 보호 강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추세에 정부도 발맞춰야 한다. 이를 위해선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가이드라인 마련이 시급하다. IP 분쟁을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 설치는 물론, 개발자를 대상으로 한 창작 윤리 강화 교육도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선의의 경쟁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제고하는 선순환 구조를 되찾을 수 있다. 게임업체 간 신뢰로 일궈온 상생이 빛바랜 단어로 전락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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