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에 '새 얼굴' 없어···'진짜 세대교체' 아직
매일일보 = 이태훈 기자 | 올해 정치권 최대 이벤트였던 4·10 총선이 치러진 지 두 달 넘게 흘렀지만, 총선 결과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계속되고 있다. 총선 국면에서 여야는 서로를 향한 '심판론'을 핵심 아젠다로 띄웠다. 이는 총선 주요 이슈로 다뤄졌는데, 이에 못지않게 주목받았던 의제가 바로 정치권의 세대교체 여부였다.
'과거 정치'의 표상으로 굳어진 86세대 일부는 이번 총선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로 인해 혹자는 "이번 총선에서 어느 정도 세대교체가 이뤄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다만 일부 86세대의 퇴장이 시대적 흐름보단 계파 갈등의 결과에 가깝다는 점, 빈자리를 채운 이들을 '새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에 비춰 정치권의 세대교체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86세대'는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을 일컫는데, 단순히 그 자체의 의미라기보단 80년대에 대학을 나와 운동권에 투신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직선제 쟁취와 민주주의 공고화를 최대 공적으로 가진 이들은 1996년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군사독재 정권에 맞선 기억을 가진 86세대 대부분은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 만 32세 나이로 당시 여당의 거물급 정치인이었던 나웅배 후보를 제압한 김민석 의원이 선두였다. 이후 86세대 정치인들은 2000년과 2004년 총선을 통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20년 넘게 대한민국 정치 중심에 있던 86세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퇴진 요구를 받았다. 긴 시간 정치권 주류로 활동하며 '충분한 기회'를 받았음에도 결과물이 미진했고, 자기들만의 공고한 카르텔을 형성해 새로운 시각과 능력을 갖춘 인사들의 정계 입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86세대 좌장 격인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86세대 상당수가 선배 정치인의 계파에 들어가 당내의 계파적 질서에만 기여한 게 과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같은 86세대 퇴진 목소리는 지난 4·10 총선에서도 재현됐다. 총선 국면에서 국민의힘은 민주당 주류였던 86세대를 '운동권 특권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퇴장으로 대한민국이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당 총선을 이끌었던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과거 운동권이었다는 것을 특권처럼 여기면서, 정치 퇴행을 이끄는 세력이 이제는 국민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며 "86 운동권 특권 세력 청산은 시대정신"이라고 공세를 폈다. 여기에 더해 국민의힘은 70~90년대생을 전진 배치하는 '789세대론'으로 민주당과의 차별화에 나서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지적한 민주당의 '정권 심판론'이 힘을 받으면서 총선은 국민의힘 완패로 끝났다. 하지만 패배 속에서도 86세대 청산에 있어선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나왔다. 스스로 불출마한 우상호 전 의원을 필두로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송갑석 전 의원 등 86세대 상징과 같은 인물들이 이번 총선을 통해 모습을 감췄기 때문으로 읽힌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일부 86세대의 퇴장은 그들의 2선 후퇴를 바라는 시대적 열망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를 위시한 당내 신(新)세력에 밀린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된 인사들 중 우상호 의원을 제외하고는 이재명 전 대표로부터 불출마를 권유받거나 경선 과정에서 패해 총선에 나서지 못한, 타의에 의한 퇴장이었다. 이들 외에도 소위 '비명(비이재명)'계로 불리는 설훈·홍영표·유기홍·김경협 전 의원 등이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종적을 감췄다.
또 이것이 진정한 세대교체 흐름이라면 그들의 빈자리를 '새 인물'들이 채웠어야 하는데, 새로 국회에 입성한 면면을 보면 그렇게 인식하긴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양문석·김준현 등 구설에 휩싸인 인사들이 '정권 심판론'의 바람을 타고 국회에 입성하면서 정치권의 세대교체는 더 요원해졌다는 우려도 나왔다.
앞서 거론한 인사들 외에 86세대 상당수가 4·10 총선에서 살아남은 점도 '세대교체 무용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총선을 통해 이인영·정청래·윤호중 의원 등 학생운동 중추에 서 있던 인물 다수가 22대 국회에 재입성했다.
4·10 총선에서 지역구 출마를 준비했던 여당 한 청년 정치인은 '4·10 총선을 통해 정치 세대교체가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86세대로 지칭되는 과거 정치세력 일부가 교체되긴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대교체가 됐다고 보긴 어렵지 않겠느냐"며 "이들이 총선 시기 민주당 내에서 벌어진 계파 갈등에 의해 '교체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정한 의미의 정치 세대교체가 이뤄지기 위해선 86세대뿐만 아니라 개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맹목적으로 시류에 편승하는 이들 모두가 정리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 지도부 출신의 한 인사도 "이번 총선을 통해 세력이 교체되는 느낌은 받았지만, 세대가 교체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세대교체가 됐다고 한다면 인물이나 미래 이슈 등으로 상징화가 돼야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며 "국민들이 보시기에 이번 총선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보자' 하는 희망 섞인 총선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준석·천하람 의원 등이 이끄는 개혁신당이 정치 세대교체의 씨앗 정도는 만든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정치 세대교체를 '젊은 피 수혈'의 관점에서만 보면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정치권 인사는 본지에 "젊음이 곧 능력을 보장하진 않는다"며 "86세대를 '청산해야 할 구시대적 유물'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그 프레임(86세대)에 맞춰 모두를 재단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세대교체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치와 비전을 얘기할 수 있는 집단의 탄생을 전제해야 한다"며 "대안 없이 세대교체가 이뤄질 수는 없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86세대 대표 격인 임종석 전 비서실장도 총선 국면에서 '86 퇴진론'이 불거지자 "(86세대가) 우리끼리 모여서 '우리가 한번 해 먹자' 그런 적은 없다"며 "집단적으로 몰아서 퇴출 대상이라고 하는 건 정치적 공격"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