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엇박자에 급증한 가계대출...빚 잡겠다던 약속도 '공염불'
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최근 시장 금리 하락에도 주요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속속 인상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뒤늦게 가계부채 증가에 고삐를 죄자 대출 증가 속도 조절에 들어간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가계대출 규제 강화 시행 연기, 정책 대출 상품 공급 확대 등으로 가계부채 증가를 부추긴 정부가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다는 지적도 많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금감원 본원에서 17개 국내은행 부행장과 가계부채 간담회를 했다. 이날 이준수 금감원 부원장(은행·중소서민금융 담당)은 “은행권은 최근의 과열 분위기에 편승해 무리하게 대출을 확대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 달라”며 “금감원도 각 은행의 가계대출 관리 실태 점검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감원은 이달 15일부터 다음달까지 은행권 가계대출 관리 실태를 살펴보는 현장 점검에 나설 예정이다. 각 은행의 자체 가계대출 목표 및 관리 실태, 대출 규제 준수 여부 등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앞서 지난해에도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주담대), 특례보금자리론 등을 중심으로 가계대출이 큰 폭으로 불어나자 인터넷전문은행을 포함한 16개 은행을 대상으로 가계대출 현장 점검을 한 바 있다.
이날 간담회는 감독 당국이 은행권의 대출 증가세를 억누르기 위해 사실상 압박에 나선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전날 금감원 임원회의에서 “성급한 금리 인하 기대와 국지적인 집값 반등에 편승한 무리한 대출 확대가 안정화되던 가계부채 문제를 다시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당국이 가계대출 단속에 나서자 시중은행들도 줄줄이 대출 상품 금리를 올리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1일부터 일정 기간 고정금리를 적용하는 혼합형 및 주기형 주담대 신규 상품의 감면 금리(우대금리) 폭을 최대 0.20%포인트 축소해 적용하고 있다. 대출 금리는 은행의 조달 비용을 반영한 기준금리에 대출자별 가산금리를 더한 뒤 거래 실적 등에 따른 우대금리를 빼서 산정하는데, 소비자의 금리 혜택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출금리를 올렸다는 얘기다.
KB국민은행도 이날부터 주담대 가산금리를 0.13%포인트 인상했다. 이에 따라 변동금리형 주담대 금리는 기존 최저 3.67%에서 3.80%로, 혼합형·주기형 주담대 금리는 최저 3.00%에서 3.13%로 각각 올랐다. NH농협은행도 주담대 금리 인상 검토에 착수한 상황이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시장 상황을 모니터링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뒤늦게 가계대출 증가세 억제에 나선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신생아 특례대출 등 저리의 정책 금융 상품 공급, 종합부동산세 완화 추진 등으로 부동산 시장에 불을 지피고, 이달부터 시행 예정이었던 가계대출 규제 강화(스트레스 디에스알 2단계 규제)까지 돌연 2개월 연기하며 시장의 대출 수요를 들쑤신 측면이 있어서다. 정부가 먼저 우회전 깜빡이를 켜놓고 뒤늦게 좌회전을 유도하며 시장의 혼선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가계대출 증가세를 잡겠다던 당국의 정책이 결과적으로 불과 반년 새 당국의 약속은 공염불이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계부채 증가의 주된 원인은 단연 주택담보대출이다. 5대 은행의 주담대 증가 폭은 4월 들어 4조3000억원으로 늘더니 5월 5조3000억원, 6월 5조8000억원까지 폭증했다. 반년간 주담대 증가 폭은 약 22조원으로 전체 가계대출 증가 폭(16조원)을 크게 웃돈다.
연초의 약속과 달리 급증하는 가계부채의 배경엔 그동안 모순된 당국의 모습이 있다. 한 손엔 가계부채 안정화를 들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 손에는 주택 매매 수요를 자극할 수 있는 정책들이 쥐어진 엇박자 때문이란 얘기다.
일례로 올해 1~5월 풀린 정책금융상품 디딤돌·버팀목 대출 잔액만 14조원에 달한다. 상반기 가계대출 증가분의 80%를 넘어선다. 당국이 디딤돌·버팀목 대출의 부부합산 한도를 상향하면서 저금리 대출수요가 쏠린 영향이다. 올해 들어 신설된 최저 1%대 금리의 신생아 특례대출 등도 마찬가지다. 설상가상 당정은 신생아 특례대출 소득기준 추가 완화작업에도 착수했다.
회심의 카드로 꺼낸 스트레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2단계 조치도 최근 연기됐다. 당초엔 이달부터 적용키로 했으나, 당국은 돌연 두 달 미뤘다. 스트레스 DSR은 차주의 대출한도를 사실상 줄이는 규제 조치다. 사실상 한도 규제 전 '막차'를 탈 기회를 두 달 더 부여한 셈이다.
이제 와선 당국도 급증하는 가계대출 추이에 부담을 느끼고 진화에 나서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임원 회의에서 "성급한 금리 인하 기대와 국지적 주택가격 반등에 편승한 무리한 대출 확대는 안정화되던 가계부채 문제를 다시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했다. 금감원은 은행권의 가계대출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오는 15일부터 다음달까지 현장점검을 진행키로 했다.
당국의 엇박자 행보에 영끌족과 전세사기 피해자의 비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도 100% 아래라지만 여전히 주요국 대비 높은 수준이다. 정책을 시의적절하게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나, 근본적으로 모순된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순 없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