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호 정치] 요즘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는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다. 남북정상회담이 대선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북.미 관계가 급진전되고,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돼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될 경우 현재의 대선구도가 180도 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치전문가 뿐만 아니라 대북전문가들 마저 내놓는 공통된 시각이다.
한반도는 현재 대통령 선거의 계절이다. 그래서 세간의 추측대로 ‘누군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혹 성사시키기라도 한다면 대선 판도에서 그 누군가가 속한 집단의 지지율은 수직상승할 가능성이 불을 보듯 뻔하다. 강력한 ‘몰표’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북정책에 ‘강경론’을 고수해왔던 한나라당으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경우의 수’라고 보는 게 맞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다는 낙관론이 퍼지게 된 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현 정부 내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역설해 온 인물.
그는 지난 1월2일 <불교방송> ‘조순용의 아침저널’에 출연,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조건을 풀어주고 어디서든 만나겠다고 했기 때문에 정상회담의 가능성이 더 커졌다”며 “북한은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정상회담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3일에는 국제기자연맹 특별총회 강연에서 “북핵 6자 회담의 성공을 위해서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는데, 이 때부터 정치권을 중심으로 남북정상회담은 ‘이루어지기 어렵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분위기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꺼질 것만 같았던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의 불씨가 김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열린우리당 김근태 전 의장은 지난 16일 퇴임 후 한 달 여 만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이뤄냄으로써, (북한과 미국이 북핵 폐기를 위한 초기 이행조치를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할 수 있는) 난관을 극복하는 추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DJ ‘정상회담’ 발언에 정치권 모조리 ‘YES’
상황이 이렇자 한나라당의 대표적인 대미통으로 불리우는 박진 의원 역시 앞서 지난 15일 S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앤조이>에 출연, “지금은 북한 핵문제 해결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상태이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밝히는 등 여야할 것 없이 다수의 정치인들이 최근 앞다퉈 그간 그토록 경계해왔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추진을 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까닭에 대북정책에 ‘강경론’을 고수해왔던 - 예를 들어 지난해 북한 핵실험 이후 개성공단 사업과 금강산 관광 중단을 요구했던 - 한나라당도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연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대북정책으로서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데 노력한다는 식으로 대북정책의 기조에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 김형오 원내대표는 16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지난해 강경한 대북정책을 쓴 이유는 북한이 미사일 핵실험을 하고 있는데 국가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정당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운을 뗀 뒤 “그러나 2.13 6자회담이 첫 단추를 끼운 상태에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일정한 조건 하에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내부적으로 ‘정상회담 경계령’까지 내려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들 정도로 남북정상회담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던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정상회담 경계령’ 한나라당도 “추진하라” 목소리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대북강경파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해온 ‘햇볕정책’의 저격수로 불리웠던 정형근 의원이다. 정 의원은 그동안 남북장관급 회담에 대해선 ‘이면합의’ 의혹을,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선 ‘대선용’이라고 비난을 해왔는데, 지난 15일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며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정 의원은 얼마 전 새 대북정책을 마련할 태스크포스(TF)의 총 책임자가 됐다. 이후 그는 기업의 개성공단 진출과 쌀 등의 인도적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의 이 같은 변화를 두고 ‘허겁지겁 옷을 바꿔 입는 꼴’이라며 곱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는 다가올 대선에서 ‘남북문제’로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한 ‘정치적 쇼’일 뿐이라는 시각 때문이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인데, 특히 정형근 의원의 확 달라진 태도에 대해선 ‘아이러니’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연내 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는 한나라당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의혹’에서 시작되고 결론은 ‘NO’에 가깝다. 이해찬 전 총리의 얼마 전 방북에 대해선 ‘한나라당의 집권 저지를 위한대선 전략’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유기준 한나라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정상회담을 하는 것에 대해 많은 국민이 반대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북한이 대선에 깊이 관여하겠다는 것을 노골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정상회담은 적절치 않다”며 “다음 정권에서 논의하는 게 마땅하다”고 말했다.
손학규, 박근혜 “찬성”, 이명박 “반대”
당내 대선주자들 가운데서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박근혜 전 대표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고,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한나라당의 전반적인 기류와 맥을 같이 하며 ‘부정적’인 입장이다. 손 전 지사는 “정치적 이용은 안되지만 연내 개최는 찬성”이라는 입장을, 박 전 대표는 “핵 폐기 조건이라면 내일이라도 무관”이라는 반응이다. 그러나 이 전 시장은 “대선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반대의 목소리다.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이 이처럼 남북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이유는 간단히 요약하면 ‘진행경과’와 ‘구체적인 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6자회담에서 북핵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이뤄져야 한다”고만 언급할 뿐 그 시기와 일정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다물고 있다. 청와대는 지난 1월부터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과잉해석’이라는 반응을 고수 중이다.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 이후 일부 보수언론을 통해 ‘의혹’으로 제기된 ‘남북정상회담 특사설’에 대해선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공식 입장도 내보냈다.
그러나 2.13 북핵 타결 이후 북미관계가 해빙 조짐을 보이면서 ‘남.북한’ 혹은 ‘남.북.미 3각’ 정상회담이 연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시작해 여의도 정치권으로부터 끊임없이, 아주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외교가 “남북미 8월 정상회담” 가능성 제기
최근 한 언론보도에 따르면, 워싱턴 외교가에선 노무현-부시대통령, 노무현-김정일, 부시-김정일 등 3국 정상들간 순차적 회담설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워싱턴 외교가를 중심으로 노 대통령의 정무특보인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 이후 남북정상회담 추진 가능성이 보다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7주년인 오는 6월15일이나 광복절인 8월15일에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정상회담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정형근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지난 1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6~7월에 한반도에서 남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면서 “특히 외무장관 회담에서 종전협정이 구체적으로 논의될 경우 곧바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건너와 한반도에서 남북미 정상회담 내지 중국까지 참여하는 4자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논다”고 주장했다. 6자회담 2.13 합의에서 북핵 해법의 가닥이 잡힌만큼, 정전협정 당사자인 미북간의 관계정상화 논의가 무르익으면 한반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 것이라는 관측이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정치권의 뜨거움 감자로 부상 중이다. 정치권은 “올해에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다음 정부에서도 정상회담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위기다. 한나라당이 대북정책을 선회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