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의 샤넬, 루이비통 브랜드의 탄생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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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국의 샤넬, 루이비통 브랜드의 탄생을 기대하며
  • 김희성 상지대학교 생활과학산업학과 교수
  • 승인 2019.12.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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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성 상지대학교 생활과학산업학과 교수
김희성 상지대학교 생활과학산업학과 교수

[매일일보] 여성 패션의 혁신 아이콘이자 명품 브랜드 샤넬을 만든 ‘가브리엘 샤넬’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아 수녀원에 있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바느질을 배웠고 돈을 벌기 위해 ‘생마리’라는 의상실에서 보조 재봉사로 일하며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1920년대 당시 여성들은 온몸을 코르셋으로 조이고 생활하는데 불편한 옷을 몸에 걸치고 다녔다. 하지만 샤넬은 여성의 몸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켜주는 획기적인 패션을 제안했고 그녀의 패션은 당시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남성복에만 쓰이는 저지(jersey) 옷감으로 여성의 드레스로 만들고, 상복에만 쓰이던 블랙으로 리틀 블랙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 드레스에는 진짜가 아닌 모조 진주로 장식을 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샤넬의 남다른 패션 안목과 시대를 앞서는 패션 감각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성들의 워너비 아이템으로 자리잡고 있다. 패션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그녀였지만 지금의 세계 최고의 명품 대열에 당당히 서 있다.

샤넬처럼 역경의 인생이었지만 시대를 앞선 또 한 명의 천재 디자이너 루이비통도 마찬가지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으며 당시 파리 귀족의 여행 짐을 싸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짐 싸는 실력은 나폴레옹3세의 황실에 까지 흘러 들어갔을 정도로 그 실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짐만 싸는 일을 하고 있는 실력을 아깝게 여긴 귀족들이 그에게 여행 가방 가게를 열어줬다.

그는 그동안 여행 가방을 쌓으며 느꼈던 불편함을 보안할 여러 가지 가방을 선보였으며 이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폭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샤넬과 루이비통이 살았던 19세기에는 귀족과 평민과 같은 신분적인 차별과 제한이 많이 있었을 시기였다. 이러한 제약에서도 그들의 남다른 통찰력과 꾸준함. 시대를 읽는 안목으로 명품 브랜드를 창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얻고 싶어하는 명품들, 하지만 그 명품들을 만들었던 창사자들은 지금 생각하면 흑수저 중에 그런 흑수저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제품들은 이젠 있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고 그 명품들은 삶의 밑바닥 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만든 옷과 가방이었다.

다만, 그들이 달랐던 것은 삶의 역경을 딛고 파격적인 디자인과 편리함, 혁신으로 브랜드를 창조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자 하는 프리미엄 럭셔리 브랜드가 됐다는 것이다.

국내에도 수없이 많은 럭셔리 브랜드가 있다. 품질이 좋고, 남보다 앞선 제품력, 또는 한류를 등에 업고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해 나가려는 브랜드들도 있다.

그러나 샤넬과 루이비통처럼 뿌리 깊은 역사와 혁신이 담겨져 있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국내 브랜드도 세월이 지나도 패션의 혁신으로 브랜드의 철학과 아이덴티티를 발전해 나가는 제품, 브랜드가 국내에서도 탄생되길 희망한다. 그래서 패션의 역사를 소개하는 강의에 샤넬과 루이비통을 학생들에게 소개하면서 함께 얘기해 보는 즐거운 그 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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