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한국은행이 지난 3월 3일 발표한 ‘2021년 국민소득’을 보면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GNI)은 3만5,168달러(우리 돈 4,024만7,000원가량)로 전년도인 2020년(3만1,881달러)보다 10.3%나 뛰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2021년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열린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이에 앞서 2021년 6월 22일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6번째로 큰 무역을 위한 원조 공여국(Aid-for-Trade donor)으로 도약했고, 국제통화기금(IMF)도 대한민국을 포함해 39개국을 선진 경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UN)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 |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는 지난 3월 18일(현지 시각) 공개한 ‘2022 세계 행복보고서(2021 World Happiness Report)’에서 한국의 행복지수(HPI | Happy Planet Index)를 5.935점으로 전체 146개국 가운데 59위로 발표했다. 또한, 통계청이 지난 3월 24일 발표한 ‘2021 한국의 사회지표'를 살펴보면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2명 이상인 22.2%가 “외로움을 느낀다.”라고 응답했고, “아무도 나를 잘 알지 못한다.”라고 느끼는 비율도 16.5%로 나타났다.
이렇듯 우리나라 국민들은 행복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방증하듯 독일 출신 프리랜서이자 저널리스트인 ‘안톤 숄츠(Anton Scholz)’ 기자는 최근 펴낸 「한국인들의 이상한 행복」이란 한국인의 불행에 대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세계적 위상은 높아지고 있지만, 한국 사람에게 “달콤한 미소에 감춰진 균열, 완벽한 웃음 속에 비친 얼룩”이 있다고 썼다.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타이틀로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한국은 ‘경제 대국’이지만 ‘행복 대국’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표들이 있다.”라고 지적한다. 한국은 최하위의 행복지수, 최상위 자살률을 갖고 있고, 이 같은 문제의 원인으로 한국인들의 ‘목적’을 잃은‘수단화’를 꼽으며, “교육이란 한평생 세상에 대한 이해와 시각을 넓히기 위해 선택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부분인데도 본래의 건강한 의미를 퇴색시키고 오직 ‘수단’으로서 팽배해지고 있다.”라며 한국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식물이 자라서 몸무게가 늘거나 키가 점점 커짐”이다. 당연히 마음을 설레게 한다. 아이의 키가 자라고 지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만큼 기쁜 일도 없다. 작은 씨앗이 발아하여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땅을 밟고 일어서는 것, 배우는 학생이 가르치는 선생의 학문을 뛰어넘는 것, 비효율적 구각(舊殼)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조개혁을 일구는 것, 낡은 사회적 통념을 깨트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도 성장의 아름다움이자 즐거움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렇듯 가슴 떨리는 성장이라는 단어 앞에 꼭 ‘경제’를 붙이는 타성과 관행 그리고 버릇이 있다.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는 경제발전을 견인한 ‘압축성장’과 ‘돌격성장’이 말해주듯 한국의 ‘성장’ 일변도의 ‘경제 지상주의’가 낳은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역대 정부의 성패는 경제적 성장을 얼마만큼 일궈내었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 때문에 경제기획원이나 기획재정부 등 경제부처는 다른 부처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중요한 중앙행정기관이 됐다. 매년 해를 마감하면서 가장 중요한 뉴스는 다음 해의 경제성장률 전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속성장’은 양적인 팽창은 일궈냈지만, 질적인 개선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물론, ‘성장’의 이면에 드리워진 폐해는 이미 60년 전인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살충제 DDT가 먹이사슬을 거치면서 계속 농축되기 때문에 사슬의 맨 끝에 있는 인간이 가장 위험하다.”라는 논리로 쓴 「침묵의 봄」을 통해 환경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경제적 성장의 한계는 50년 전인 1972년 로마클럽(Roma Club)의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통해 지구 환경문제를 논하면서 환경에 관한 관심과 논의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해 6월, 유엔(UN)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하나뿐인 지구(Only One Earth)’를 주제로 인류의 미래에 관한 인간환경회의(UNCHE)를 개최하여 인간환경선언(스톡홀름 선언)을 선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회의를 계기로 6월 5일이 ‘세계 환경의날’로 제정되었고, 이후에도 리우환경협약(1992), 교토의정서(1997), 파리기후변화협약(2015) 등을 통해 지구촌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사회 연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성장’ 그다음의 비전은 지금까지도 확고하게 형성되지 않았다. 동반성장, 혁신성장, 포용성장, 지속가능성장, 소득주도성장, 투자주도성장 등이 지금까지 대안적 비전으로 거론되었거나 거론되고 있지만, 여전히 성장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형국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장 앞에 무슨 접두어를 붙이든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소비와 생산이 증가해야 한다는 경제 논리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믿고 따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근년에 들어 ‘탄소 중립(탄소 순 배출 제로)’과 함께 ‘ESG 경영’이 현실화하면서 위기의 성장사회를 넘어 지속 가능한 성숙사회로의 대전환의 필요성이 급부상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기후위기’의 심각성은 향후 10년 이내에 1.5℃ 상승을 막지 못하면 ‘티핑포인트(Tipping point | 회복할 수 없는 급변점)’를 넘어서게 된다. 그런데도 수직적인 성장과 직선적인 발전에 기반한 무한 풍요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정부의 탄소중립정책 추진만으로, 탄소배출권거래제도 시행만으로, 기업의 ESG 경영 도입만으로, 석탄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의 단계적 폐쇄만으로, 쓰레기를 서서히 줄이는 것들과 이들의 효율을 높일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성과를 낼 정책을 보완하는 것만으로 과연 해결할 수 있고 정말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지난 1월 8일 국회의장 직속 ‘국가중장기아젠더위원회’는 향후 15년간 한국의 나가야 할 방향을 담은 「미래비전 2037 | 성장사회에서 성숙사회로 전환」을 발표했다. 행정부의 5년 임기를 넘어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할 국가 차원의 과제를 발굴하고 미래 이슈를 검토하기 위해 2020년 11월 말 설치된 국회의장 직속 자문기구인 이 위원회에서는 국회미래연구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관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비롯한 주요 대학의 전문가 60여 명으로 공동연구팀을 구성하여 지난 1년간 추진한 연구 결과다.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성취했으나, 성장의 이면에서 분열과 갈등, 불공정과 양극화, 적대와 대립과 같은 사회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라며, “이제는 국가의 발전 목표를 위해 사회와 개인이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주체로서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양적 확대보다 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성숙사회’를 국가 비전으로 제시한다.”라고 밝혔다.
이 비전에서 제시한 3가지의 지향 가치는 첫째, 국가 주도에서 자율과 분권으로 발전하는 사회, 둘째, 경제성장 중심에서 다원가치 중심, 셋째, 사회적 약자를 우선하는 따뜻한 공동체이다. 또한 이 비전에서는 ‘성숙사회’를 위해 3가지 분명한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데, 과거의 ‘국가의 성장’에서 이제 ‘개인의 성장’으로, 과거 ‘경제성장’에서 이제 ‘환경보존’으로, 과거 ‘효율성’ 중심에서 이제 ‘형평성’ 중심으로의 전환이다. 그래서 기존 경제성장과는 다른 ‘탈성장, 대안적 성장’을 망라한 ‘다원적 가치 성장’을 지향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국회 미래연구원은 성장사회를 벗어나 성숙사회를 추구하는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3,000명 대상의 온라인 조사와 202명의 시민이 참여한 숙의토론형 공론조사를 통해 새로운 선호 미래상으로 ‘성숙사회’를 도출했다. ‘성숙사회’는 효율성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국가 주도의 경제적 성장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사회를 일컫는다. 각 개인의 처지에 맞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형평성, 사회적 신뢰나 연대, 건강의 증진 같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생물 다양성 보존과 기후변화 대응에도 적극적인 사회로 헝가리 출신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미래학자인 데니스 가보르(Dennis Gabor) 교수가 1972년에 쓴 책 제목(Mature Society)에서 유래 되었다.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과 흙이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라며 “전국에 웬만한 땅 파보면 어마어마한 쓰레기가 나온다.”라고 증언했다. 또한 “경제성장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시대는 지나갔다.”라며 “한 방향으로만 가는 사회에서 끝이 없는 경쟁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성장을 위한 기계로 사람을 취급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라고도 했다. 이런 의견들은 성숙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짐작하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성장’에서 ‘성숙’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넘어야 할 선택과 포기의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다. 성장의 후유증에 시달린 지구의 몸살을 치유하고 극복해야만 한다. 따라서 기후 위기는 결국, 성장 지상주의의 경제 논리를 과감히 버리고 탈성장(Deglowth)으로 가야만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자 확실한 정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선 경제 중심의 성장과 발전의 지표부터 바꿔야 한다. GNP(국민총생산), GDP(국내총생산) 같은 생산과 소득 위주로 지표를 삼았던 과거의 관행과 사고를 과감히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돈과 경제가치로 환산하는 물질 만능의 ‘상품화’를 도려내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적 접근과 인적 교류, 자연적 감성의 조화, 돌봄, 나눔, 협동, 상호부조, 공동체성 등 ‘관계성’을 성숙의 가치와 지표로 전환해야 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단기적인 근시안적 이익과 이윤 동기, 선거만 의식하고 책임지는 정치가 아니라 먼 훗날 후손의 이익을 기준으로 정의와 가치를 세우는 직접민주주의, 인간뿐만이 아니라 뭇 생명의 삶과 그들의 권리까지 고려한 생태민주주의를 선택해야만 한다.
환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미래세대에 관심이 많다.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빙하가 녹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을 넘어서, 앞으로 이 지구에서 태어나 자라게 될 미래세대가 자연과 대립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자연과 생태계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구의 구성원으로 서로 먹이사슬과 생태 피라미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환경은 구호가 아닌 실천이자 행동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들끓고 있다. 한쪽에 기후와 생태의 위기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불평등과 인권의 문제가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팎으로 맞물린 환경위기와 인권위기의 연계성을 탐색하고 이 악순환을 끊어낼 사회와 생태 전환의 길을 제시하는 인권학자 조효제 교수는 「침묵의 범죄 에코사이드」에서 “지구행성 전체는 하나의 단위로 작동되고 있기에 국경선에 한정해서는 환경위기나 인권침해의 문제를 온전히 돌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환경파괴와 인권파괴는 한 몸에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서로 연계된 비극으로 나타난다.”라고 설명하고, “우리는 인권과 환경을 서로 다른 영역의 문제로 다루는 칸막이식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하지만 인류의 풍족한 삶을 위한 지구행성의 총체적 파괴(Ecocide │생태살해)는 자연의 역습으로 인한 인간 말살(Genocide│집단학살)을 낳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서 인간의 권리를 과감하게 축소하되 비인간 존재까지 포괄하도록 자연의 권리는 대폭 확대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이제 세계는 점진적으로 환경에 관심이 커지면서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서는 「헌법」에까지 명시하기에 이르렀다.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와 균형이 공존하는 ‘좋은 삶’이란 의미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나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i)’가 새로운 지표가 되어 뜨거워지고 있다. 이는 그것과 함께 자연의 권리를 강조하는 말이다. 물질의 풍요와 소유를 삶의 척도로 삼는 게 아니라 존재의 다양한 가치들을 끌어안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남아프리카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라는 상호 의존과 협동을 의미하는 ‘우분투 (Ubuntu)’가 주목받는 이유다. ‘탈성장’을 주장하면 대뜸 “가난한 옛날로 되돌아가라는 말이냐?”라고 비난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소유가 죽음이 아니듯, 탈성장도 결단코 종말이 아님을 통찰해야 한다. 그것들이 비로소 바른 사회가 되어가는 첩경임을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고 공생하는 삶의 지혜를 실천으로 옮기는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임을 깊이 명찰하고 위기의 성장사회로부터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성숙사회로 대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박근종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