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못거두는 피해자들 “뒷북 연속에 실효성도 의문”
매일일보 = 나광국 기자 |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23일 당정협의에 따른 구제대책 마련 등 뒤늦게라도 나온 대책은 반기면서도 아쉬워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A씨는 “정부와 정치권에서 뒤늦게라도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는 것은 다행이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효과가 나타날지는 의문”이라며 “그동안 피해자들이 호소했지만 올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나오고서야 대책이 마련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대규모 전세사기 피해와 피해자들의 극단적 선택이 이어지자 정부와 국회는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동안 전세사기 피해 대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실효성이 떨어져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역부족이란 지적이 많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불신은 아직 여전한 상황이다.
23일 정치권에 따르면 당·정·청은 이날 회동을 통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임차주택을 낙찰받기를 원하는 피해자들에게 우선매수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특별법을 이번 주 중 발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피해자들이 요구해온 주거권이 보장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있다. 당정청이 이날 구제책을 확정했다고는 해도 추가피해자가 속출할지도 모르는 판국에 국회 통과 절차 등을 감안하면 또 일주일가량을 기다려야 한다. 이날 나온 방안도 그동안 피해자들과 야권에서 주장해온 구제책 중 현실적인 채택을 종합한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이미 경매로 주택이 넘어간 피해자나 손해를 본 보증금 회수 등의 세부구제책은 빠져 있다.
또한 정부 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피해 확인서 발급이 필요한데 피해 기준을 특정하기가 애매할 뿐더러, 아직 전세 만기가 되지 않아 본인이 피해자인지 인식조차 하고 있지 못하는 피해자도 많은 실정이다. 당정청이 그동안 여러 대책을 내놓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당초 피해자들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구체적 대책을 마련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처음부터 정부의 대응이 너무 늦었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 부처 자료를 종합하면 지난 2022년 12월 주택 1000여채를 보유하다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사망한 이른바 ‘빌라왕’ 사건 발생 후 정부는 20여개 전세사기 피해지원 대책을 내놓았다. 초기 대책은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 가입자의 보증금 반환 절차를 앞당기는 데 집중했다. 이후 피해자들의 전세자금 대출 만기 연장 및 저리 전세대출, 긴급거처 지원 대책이 잇따랐다.
예방 정책도 발표했다. 정부는 우선 올해 5월부터 전세보증금이 집값의 90% 이하인 주택만 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 집값과 같은 가격에 전세를 들이는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주택 수백·수천 가구를 사들인 이후 보증금을 떼먹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또 ‘안심전세 앱’을 출시했고 오는 9월부터는 여기에 ‘나쁜 임대인’ 명단을 공개하기로 했다.
지난 18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전세 사기 피해자 3명이 잇따라 숨진 것과 관련 부동산의 경매 일정을 중단하는 방안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21일에는 전세사기 피해자의 경매 주택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매입임대 제도를 활용해 대신 매입해주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발표 전날까지도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공공매입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나, 피해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비난여론이 일자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집이 낙찰된 피해자 등은 마땅한 구제책이 없는 상황이다. 인천시에 따르면 미추홀구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피해로 지난 3월 말 기준 1523가구가 임의 경매(담보권 실행 경매)에 넘어가 이 중 87가구가 매각됐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이달 기준 이보다 30가구가량 많은 106가구가 이미 경매에서 매각된 것으로 집계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은 지난해 11월 7일부터 첫 매각 세대가 나오기 시작해 정부가 경매 유예 방침을 발표한 지난 19일까지도 낙찰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이 중 매각이 빠르게 이뤄진 세대는 낙찰자의 퇴거 요구로 집을 비워준 상태다.
미추홀구 주안동 전셋집이 경매에 낙찰된 전세사기 피해자 B씨는 “이미 집이 낙찰됐고 퇴거 요구로 서둘러 집을 나왔는데 뒤늦게 경매 유예를 해 봤자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무슨 소용이냐”며 “집이 경매에 넘어간 임차인이 최우선변제금을 받으려면 낙찰자로부터 인감증면서, 명동확인서를 받아 법원에 내야하기 때문에 지금 나오는 대책은 그림의 떡”이라고 호소했다.
물론 피해자들에 대한 경매 중단이나 금융 지원 확대 등의 조치가 이제라도 나온 것에 안도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시간 벌기 성격인 만큼 전세사기 피해 후속대책의 한계는 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금융당국과 금융권 지원이 내놓은 대책은 대출을 더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덜어주는 방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주현 지지옥션 선임연구원은 “우선 매수할 수 있는 금액이 불확정적이고 낙찰가가 높아지면 우선매수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면서 “우선 매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후순위이기 때문에 손실을 봐야하는 보증금 액수가 많고 그럼 추가 대출을 받아야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 집을 계속 살고자 하는 피해자들을 위한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화곡동 인근 전세사기 피해지역에 거주하는 C씨는 “DSR 규제는 소득에 비례해 빚을 내주기 때문에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것”이라며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경우 향후 불어난 빚 감당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여야가 여러 대책 검토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피해자들 입장에선 근본대책은 없고 실효성 있는 대책은 지연돼 답답하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