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최대억 기자 |
한국전쟁 후 김일성 1인 독재와 우상화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기자출신 김학철(본명 홍성걸, 조선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서, 중국 하북성 태항산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일본 형무소에 수감된 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다리 하나를 절단하게 된다.
광복 이후 서울로 돌아와 기대를 저버린 이승만 독재 정권에 반발, 북한으로 건너가 노동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김일성 독제체제에 항거하다 다시금 중국으로 망명, 모택동 독재와 문화혁명 등을 비판했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김학철은 50여년째 굴곡 삶을 살다가 2001년 9월 연변에서 병사했다.
시대를 넘어 자유·평등·민족·세대 통합에 고심한 그의 흔적을 찾아 2019년 8월 31일 중국 훈춘에 머물렀으나 여(餘)가족은 제3국에 이주했다더라.
석달 후 김학철 못지않은 식견을 지닌 조선족 정인갑을 소개받았다.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 격인 중국의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퇴임 후 칭화대 교수를 거쳐, 작가로서 여생 보내는 정인갑을 만나 제3의 눈으로 민족의 여백(餘白)을 듣게 된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2년 10월에 출간한 ‘김영삼 2000 신한국’ 책자를 ‘21세기 신한국 창립(開創二十一世纪新韩國)’ 제하의 한어(漢語)로 번역, 중국(인민출판사)에서 발행한 바 있다.
책속엔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의 지도자로 성장,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내용 등이었다.
이 책으로 인해 1995년 김정일 정권 시절 북한을 방문했다가 신의주에서 부터 따라붙은 보위부 요원에 의해 한국 측 간첩(안기부 결탁)으로 낙인 찍혀 억류되는 등 다사다난(多事多端) 삶을 회고하던 중, 최근 필자에게 우리 정치권의 대(對)일본 외교 전략의 허·실을 짚으며 ‘여전히 아마추어’라 직언한다.
예컨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2005년까지, 27년간 일본을 상대로 역사 왜곡 및 영토 분쟁을 둘러싼 감정을 숨기고 정면충돌에 소심 일관했다. 일본 자본을 최대한 끌어내 중국의 근대화 실현이 목적이었다.
2005년, 세계 각국의 대(對)중국 투자 활황이 극에 달하자 그해부터 중국은 반파쇼전쟁 승리 60주년 차제에 항일 드라마·영화를 수없이 배출하기 시작, 이후 일본 투자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유아무야(有耶無耶) 배짱을 부리는 양상이다. 앞서 1937년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 등 굴욕 41년, 재회(再會) 27년 총 68년 절치부심의 결과다. 이후 중국에 세워진 '안중근 기념관'도 일본의 거센 반발을 비웃듯 같은 맥락에서 진행됐다.
우리네와 달리 중국 지도부는 30~35년간 용케 견뎌야 정치국 위원에, 5년 이상 추가 검증돼야 중공중앙 총서기 및 국가주석이 될 수 있는 체제로, 치국위해 근 이립(而立) 세월 당원들의 오프더레코드 합심이 큰 몫을 했다고.
일당 독제체재인 중국을 두둔함이 아니라, 불리할 때마나 ‘친일’, ‘반일’ 프레임 씌어 밥이 설익기도 전에 가족끼리 침 뱉는 격인 우리 여야정치권이 신중하게 새겨들을 법하다.
아울러 대(對)미·중·일 외교 전략에서 우리 기질에 익숙한 조선족, 재일·재미교포가 양국 관계의 우호 증진 및 통일에 이바지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적)에서 선봉이 될 수 있다는 필자의 사견에 정인갑도 공감한다.